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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부모님은 나를 인천 화교중학교로 보냈다. 이불과 옷가지들을 기숙사 앞에 내려주고 아버지와 형은 1호선 전철을 타고 수원을 거쳐, 시외버스를 타고 평택으로 돌아갔다. 책은 학교에서 받아왔다. 적당한 가방이 없어 학교 앞 슈퍼에서 받은 비닐봉지에 책을 담아왔다.
서울, 부산, 인천 3곳에 화교 중고등학교가 있었다. 그중 인천으로 오게 된 것에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 10살 터울이었던 형도, 11살 터울인 누나도 거기를 갔으니, 막내라고 다를 이유는 없었다.
기숙사는 2층짜리 건물 두 채가 벽에 맞대고 붙어 있는 형태였다. 정문에서 보았을 때 왼쪽 건물 1층은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기숙사는 학교에서 꽤 떨어져 있었는데도(10분 정도 걸어야 했다), 1층 식당은 사생들의 전용 식당이 아닌, 학교 급식소처럼 운용되고 있었다. 기숙사생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기숙사 전용 식당으로 이용하기엔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았고, 열악한 학교 재정상 학교에 별도의 급식소를 설치할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점심시간 때면 학생들이 언덕 위 학교에서 때를 지어 언덕 아래 기숙사 건물까지 걸어오곤 했다.
정말 본격적인 급식소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검게 변색한 기름때 묻은 가스레인지 2개 정도가 조리기구의 전부였고, 덜덜거리는 소형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한 식자재들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8명이 앉을 수 있는 나무 식탁 6개, 교실에서 가져온 덜컹이는 의자 몇 개. 식당 한편에는 고장 난 의자들과 식탁이 쌓여 있었다. 그 틈으로는 거미줄과, 학생들이 버려 놓은 쓰레기들이 있었다. 벽에는 기름때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시간에 맞춰 오시는 식당 아줌마가 가져다 놓은 라디오 하나 정도가 이 ‘식당’이 제공하는 편의였다. 식당 아줌마는 거기에 있는 가구 같았다. 때가 되면 어떻게 배달된 건지 알 수 없는 식자재로, 언제나 비슷한 음식을 해놓고 간다.
오른쪽 건물 1층은 여자 기숙사로 쓰였는데 내가 입학할 무렵에는 여자 기숙사생 3명이 사감도 없이 학생들끼리 지내고 있었다. 남학생들이 여자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어 있다. 그 원칙을 강제할 사람도 없었지만 남자 사생들은 사춘기의 남자들치고는 이상하리 만치 1층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여자 기숙사에는 언제나 폐허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2학기 때는 여학생 3명이 따로 하숙집을 구해서 기숙사를 떠나면서 여자 기숙사는 버려졌다. 여자 기숙사는 남자 기숙사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왼쪽 건물 2층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1층 식당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폐쇄되어 있었고, 그 앞에 예의 의자들이 쌓여 있다. 왼쪽 건물과 오른쪽 건물은 벽이 맞닿아 있다 뿐이지 애초에 별개의 건물이기 때문에 건물 외벽으로 막혀 있다. 왼쪽 건물 옥상과 오른쪽 건물의 옥상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고, 두 건물은 이격 없이 붙어있다.
옥상에서 왼쪽 건물 2층으로 연결된, 나무로 된 해치 문이 하나 있었다. 나무로 된 문은 섞어 문드러졌기 때문에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구멍이 나 있었다. 그 사이로 보면 가파른 사다리 형태의 계단이 보였지만, 그 안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해치 문 자체는 잠겨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 대해 볼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도 거기가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왼쪽 2층에는 좁은 창문 2개가 나있었지만 창문에는 나무판이 덧대어 있었다.
튼튼한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건물의 원래 용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병원이었다, 교도소였다 하는 뜬소문들이 나돌곤 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물어봐도 그 건물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 회색 건물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 같았다고, 그 동네에서 자란 반 친구 하나가 말하곤 했다.
큰 창문이 있었기 때문에 교도소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2층으로 난 가파른 계단을 보면 병원도 아닐 것이다. 애초에 기숙사용 도로 지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건물의 유래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상상력 좋은 중고등학생들이 그 건물에 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건물은 괴이했다. 사람이 살도록 설계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거기엔 사람의 손길을 밀어내는 분위기가 있었다.
남자 기숙사는 오른쪽 2층에 있다. 기숙사에는 두 개의 큰 숙소가 있었는데, 숙소 하나는 더 이상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잠가버렸다. 몇 안 되는 사생들은 다른 숙소 하나에 모여 살았다.
군대 막사와 같은 구조였다. 단, 일반적인 막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2층 침대가 붙박이 방식으로 일렬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을 ‘침대’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는데, 개별적인 가구들이 모여 있는 구조가 아니라, 단단한 목재로 된 긴 침상 하나와 그 위에 깔린 노란 장판이 이른바 '1층'을 구성하고 있었고, 같은 구조의 긴 침상이 '2층'을 구성하는 형태였다. 당시 사생은 6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공간을 1, 2층을 나눌 필요는 전혀 없었다. 천장이 높지도 않은 숙소를 위아래로 잘라냈기 때문에 이런 구조는 불편하기만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설치되어 있는 2층을 뜯어낼 정도로 이 건물을 아끼는 사람도 없었다.
침상 안쪽에는 목재로 된 사물함 같은 것들이 붙어있다. 침상과 같이 갈색 페인트로 조악하게 칠해져 있었다. 침상들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좁은 침상 밑을 청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층 침상과 바닥 사이에 빈 공간에는 언제부터 쌓였는지 알 수 없는, 버려진 신발들, 가방들, 쓰레기들이 들어차 있다. 사생들은 그 사이로 꽁초를 버리곤 했다.
마주 보는 침상 사이의 남은 공간이 복도다. 그 끝엔 창살이 쳐진 창문이 있었다. 북향이었다. 그래서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지만, 담배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은 됐다. 창문 너머로 멀리 바다가 보인다. 새벽에도 크레인들이 움직이는, 공업화된 바다. 창문에 왜 창살이 쳐져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창살 너머는 거의 낭떠러지였고, 그 아래엔 단층 건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곳으로 사람이 출입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숙소 바로 옆에 사감실이 붙어 있다. 사감실에는 합판으로 된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놓여있었고, 창문은 없었다. 그나마 천장 바로 아래에 복도를 향해 난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그것조차 나무판을 덧대 막아버렸다. 사감은 미술선생이었다. 그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기에는 사감실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웬만한 학교 교실 크기만 했던 자습실 한 편을 이용했다.
사감은 거기서 그림을 그리다 가끔 큰소리로 웃곤 했다. 그럴 때면 그 웃음소리가 복도를 타고 숙소까지 울려왔다. 공명으로 인한 왜곡 때문이었을까. 나는 늘 그 웃음소리가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내가 사감이 실제로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오르면 오른쪽으로는 숙소로 이어지는 복도가 있다. 1층 계단 입구에서 바라보면 2층과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한 줄로 이어져있다. 그래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계단은 유난히 길어 보이고, 또 유난히 가팔랐기 때문에 목을 완전히 들어 올려야 옥상까지 이어진 계단 끝을 볼 수 있었다. 옥상으로 나가기 전에는 계단실이 하나 있었다. 거긴 아무런 용도도 없었는데, 그에 비해 지나치게 큰 느낌이 있었다. 페인트칠도 되어 있지 않은 계단실은 버려진 공사장 같았다.
숙소로 가는 복도 왼쪽에는 철제 소변기가 있는 공용화장실과, 탈수만 할 수 있는 세탁기가 있는 큰 세면실이 나란히 있다. 둘 다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습기는 복도를 통해 천천히 빠져나갔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습기는 그대로 갈색 곰팡이가 되어 화장실과 세면실 주변에 자리 잡았다.
그 복도는 다시 T자형으로 다른 복도와 이어졌다. 왼쪽으로 가면 사감실과 우리가 사용하는 숙소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폐쇄된 숙소가 왼쪽에, 예의 자습실이 오른쪽에 있다. 자습실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는데, 거기서 다시 창고로 이어지는 구조다. 기숙사에 공간이 남아돌았기 때문에 실제로 창고에 무언가를 보관할 일은 없었다. 창고 안에는 언제부터 쌓아 놓은 건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먼지에 뒤덮인 오래된 교과서나, 졸업생들이 버리고 간 이불들, 옷가지나 신발 같은 것들.
복도 벽은, 다른 벽들과 마찬가지로, 아래쪽은 초록색 페인트로, 위쪽은 하얀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복도 자체는 넓은 편이다. 약 2.5m 정도로 상당한 폭이었는데, 많은 학생들이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설계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계단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복도가 만나는 지점에는 주홍색 등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고, 계단에는 아무런 조명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밤에는 복도에서 새어 나온 주홍 불빛에 의지해 그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다행히 계단에는 철로 된 손잡이가 있었는데,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손잡이는 이미 너무 많은 손길로 닳아버려 매끈한 철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계단을 오르고, 넓고 황량한 복도를 따라 숙소로 들어가면, 거기서 2중 침상들의 대칭적인 구조와, 문과 좁은 창문까지 일직선으로 놓인 좁은 복도를 볼 수 있다. 거기가 사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그 한편에 나는 고향에서 가져온 이불과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기숙사의 구조 전체를 관통하는 일종의 합리성 같은 것이 있었다. 즉, 가능한 공간 내에 가능한 적은 비용으로 가능한 많은 사람을 수용하자는 것이다. 나는 그 합리성이 괴이하다고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았다. 기숙사에는 사감과 나를 포함해서 총 7명이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합리성에는 이미 과거에서 던져져, 우연히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된, 이미 그 목적을 망각해버린, 오래된 이념과 같았다.
사감은 밤이 되면 기숙사 모든의 조명을 꺼버렸다. 기숙사 관리에 대체로 무심했던 사감은 전기절약 같은 것만은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때는 아직 90년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그건 사감의 개성이라기보다는, 위 세대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설령 조명이 켜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초라한 불빛에 비해 기숙사의 공간이 지나치게 넓었다. 그래서 어둠만 더 부각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