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의 물고기
9/ 언덕 위의 물고기
목적지는 고양시 화전동 망월산 중턱쯤에 있다. 손시정은 산을 가득 매운 매미소리를 들으면서 액셀을 밟는다. 차는 굉음을 내며 산길을 올랐지만 그 소리는 빗소리에 파묻힌다. 폭우가 내리는 숲은 시끄러우면서도 조용하다. 그 사이로 나있는 검은색 아스팔트 길을 따라간다. 손시정은 그 길에 그려져 있는 노란선을 주목한다: 비에 젖어 더욱 반짝인다.
차는 다른 것보다 가격으로 유명한 ‘클래식 GX’. 차 이름처럼 클래식하다. 자율주행 기능은커녕 그 흔한 정속 주행기능, 주차 보조장치도 없다. 동력은 가솔린, 이제 부품 조달도 힘든 유압식 핸들링은 운전자의 팔뚝근육을 키우는데 최적화돼있다. 속도는 엑셀과 브레이크를 통해서만 조절된다. 내비게이션은 없다. 계기판은 아날로그시계 모양. 클랙슨 차임벨. 8기통 엔진은 괜찮은 출력을 자랑했지만, 400마력, 토크 110 kg.m.정도는 가볍게 구현하는 최신식 전기엔진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 클래식 GX는 휘발유 차량 중에서도 으뜸으로 뽑히는 최악의 연비를 자랑한다. 주유소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시판 중인 휘발유 차량들은 주행거리 확보를 위해 200리터 정도를 주유할 수 있게 진화(?)해 있다. 손시정의 클래식 GX는 트렁크 공간을 기름통으로 개조한 케이스다. 덕분에 ‘만땅’을 채우면 2000킬로 미터 정도는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다: 손시정은 그 점을 좋아한다: 멈추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유일한 제한은 도로뿐이다: 그 위로 차가 미끄러진다: 차는 순전히 운전자의 의지 대로만 움직인다.
클래식 GX의 또 다른 셀링포인트는 말도 안 되는 가격: 소비자 판매가 4억 원이. 가격에 비하면 ‘하차감’도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이 차를 타면 ‘부자’가 아니라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되고는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시정은 그게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사람.
이상한 사람은 생각한다: 운전은 스포츠고, 클래식 GX만큼 그를 만족시켜주는 운동기구는 없다. 차는 매연을 뿜으며 꼬불꼬불한 아스팔트 길을 따라간다.
이상한 사람은 차창으로 흩어지는 빗방울들 본다.
오래전 이런 순간이 있었다. 끝없는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고, 그걸 지켜보던 순간들이 있었다.
-
빗 속을 달릴 때 창문에 흩어지는 빗방울들을 보는 게 좋다. 흐름을 타고 흐르다, 뭉치다, 흩어진다.
손시정은 좌석을 뒤로 밀어 놓는다. 그렇게 하면 공간이 나온다. 핸들이 다소 거추장스럽긴 하지만, 핸들을 감아 놓는 것은 아직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고 하니 그 점은 감수해야 한다: 몸을 다소 비틀어 앉는다: 오래 시간에 걸쳐 개발한 요령: 엉덩이가 다소 눌리지만 기타 넥이 벽에 닿지 않게 된다: 연주하면서 리듬에 따라 몸을 조금 흔들 수 있다: 그렇게 박자를 맞추는 것이다.
-
금붕어
어항에 넣어둔다, 그는 자신이 어항 속의 물고기라고 상상한다.
-
그녀가 그의 손 위에 손을 올릴 때 그는 가슴을 차는 듯한 충동을 느낀다: 그가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충동: 생각들, 감정들, 느낌들이 한 사람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순간으로 모여 운명이 되는 것일까?
그렇게 쓴 노래가 "Hit".
그리고 노래가 성공했다. 그건 저주였을 지도 모른다: 모든 기쁨이 결국 고통으로 귀결되는 것이라면 그건 저주였다고 평가해야 하는 걸까? 모든 기쁨이 결국은 자신을 파괴하는 슬픔으로 귀결된다면?
실용음악학원에서 만난 듀오가 어설프게 녹음한 곡이 느닷없이 히트했다.
오구연은 작은 카페를 운영했다. 그는 거기 걸려있던 그림들을 떠올린다. 1번: 노란 바탕에 검은 점들이 흩어져 있는 추상화: 그녀는 그게 별들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게 땅에 흩어진 기름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말하진 않았다. 2번: 파란 배경에 흩어진 검은 점들: 그는 그게 바닷속을 헤매는 물고기들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게 꿈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손시정은 생각한다: 대체 이 여자의 머리에 뭐가 돌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저 작은 머릿속에는 우주가 들어 있다: 우주에 떠도는 수많은 별들: 꿈들 : 하루는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보다 잠들었다: 그렇게 쓴 노래가 "꿈들의 바다".
-
부업이 지나치게 성공하면 본업을 유지하기 어려운 순간이 온다: 선택지 1- 회사에서 알파 OS의 개발 업무를 담당한다: 그의 주요 업무는 테스팅, '질의', 해석: 알파 OS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찰하고 조사하는 게 그의 업무이다. 선택지 2- 유명가수가 된다.
-
스테이지에 올라섰을 때 그 환호를 기억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온통 하얗다. 끝없는 빛에 눈이 멀어버린 걸까, 그 빛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환호성뿐. 귀가 먹먹하게 울려오는 환호성:
여기서 어둡고 잔잔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
아직도 브라운관 티브이가 있는 호주의 시골 호텔이었다. 손시정은 브라운관에서 천천히 사라져 가는 자신의 얼굴을 본다. 수많은 새들이 나무 위에 앉아 있다.
손시정이 던진 재떨이가 브라운관을 깨뜨렸고, 오구연이 던 지 가방이 스탠드를 넘어뜨렸다.
-
"앙상블의 데뷔작 ‘꿈의 시’는 다분히 서정적이고 복고적인 포크 풍의 앨범이었다. ‘꿈의 시’는 낮은 톤의 기타 연주에 얹어지는 손시정의 굵지만 민감한 목소리와 오구연의 얇게 떨리는 목소리가 만드는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는 화음인데, 두 보컬은 날카롭게 싸우는 것처럼 들리다가도, 이내 합쳐져 조화를 이루게 된다 - 마치, 이들의 관계를 예언하는 것 같이." - DOUES MUSIC REVIEW
"... 앙상블의 전설적인 1집에 수록된 곡들은 모두 듀오인 손시정과 오구연의 합작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틀즈의 존 레넌과 폴 매커트니가 그들의 곡에 “레논-매커트니”라고 적어놓은 것을 본떠, 모든 작사, 작곡자란에 “구연-시정”라고 명명했다. 순수한 아마추어 밴드에서 시작된 초기에, 그들이 얼마나 뜨게 될 줄 모르고 반쯤 장난 삼아 그렇게 한 것인데, 이로 인해 팬들은 과연 어떤 곡이 ‘시정’의 곡인지, ‘상규’의 곡인지 격렬한 논쟁을 펼치게 되고 만 것이다." - SigMa Review
"... 잘못된 저작권자 표기 방식이 이혼 재산분할 소송을 복잡하게 만든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저작권과 방송 vol 56.
"... 하지만 이혼소송의 계속은 숙명적으로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남녀의 변덕스러운 사랑이 법률절차의 집행에 큰 영향을 주는 대표적 사례가 이런 것이 아닐까?" - 사회와 법 vol 178
-
손시정은 딸을 가슴에 안았다. 온통 젖어 있다. 축축한 눈과 피부, 머리를 받치지 않으면 뒤로 넘어간다. 그래서 깊이, 조심히 안아야 한다: 손시정은 이름을 지었다: 수연.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 그걸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을 확인할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들의 사랑을 다시 소통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딸이 걷기 시작했을 때, "수연"이라는 이름에 곱슬머리를 한 아이가 반응했을 쯤이었다: 그런 딸을 앗아간 것은 사소한 실수였다: 건전지를 삼킨 것이다.
사랑을 소통하는 방법을 찾던 연인들은 끔찍한 과실치사의 공범이 되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공범들은 속옷 차림으로 어둠 속에 앉아, 또는 큰 저택을 신경질적으로 걸어 다니며, 서로를 비난하는 걸로 자신의 죄책감을 달랜다: 끔찍한 말들이 오간다: 접시들이 깨진다: 가구들이 부서진다. 취하되었던 이혼 소송은 2년 만에 다시 제기된다. 돈이야 서로 많았다. 재산을 분할하는 방법도 이미 한 번의 소송을 거치면서 정리되어 있었다: 이혼소송은 다분히 감정적이었고, 변호사들은 기꺼이 그들의 감정싸움을 대신한다: 청구서를 내밀면서.
-
"'그날'로 몰아갔던 그 일련의 불행들이 그에게 음악적 영감과 추동력을 준 것일까? 전체 커리어에서 가장 깊이 있는 음악은 그 기간 동안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어떤 커리어의 성공도, 어떤 아름다운 선율도 그에게 위로를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음악가는 영감들이 아까워서 곡을 쓰고, 달리 곡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곡을 발표하고, 발표된 곡들이 계속해서 히트를 친다 - 수억 명이 그의 노래를 듣지만 그가 상정하고 있는 상상 속의 관중은 오구연과 딸 수연이 아닐까? 이 안타까운 천재의 음악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어떤 음악도 생명을 다시 살려내지 못하고, 어떤 사랑도 대체하지 못하는 것 같다. - 음악리뷰어 정지혜의 개인 블로그
-
양화대교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목격되었다.
손시정은 의식을 잃지 않았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물을 느낄 수 있다. 이 물을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게 되면 잊게 될 것이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망각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
구조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대낮에 뛰어내린 것이 실수였다. 물에 뛰어내린 게 실수였다. 다리 위에 감시용 카메라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게 아닌데. 물은 아팠다. 그냥 베란다 너머로 뛰어내렸으면 짧게 끝났을 일을.
구조대가 그를 차가운 한강물에서 건져 올렸다. 스타는 곧 신촌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고, 심각한 부상도 없었다:
“수면에 부딪힌 충격으로 인해 왼쪽 고막이 파열된 상태라고 합니다!” 기자들이 병원 앞에서 카메라를 향해 소리친다.
웅웅 거리는 이명으로 인해 손시정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다.
꿈속에서도 웅웅 거리는 이명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그나마 고요함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신비하게 이어지는 하나의 꿈뿐이다: 그는 물속에 들어가고, 물속에는 수많은 은빛 물고기들이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다. 돌고래가 그들을 잡기 위해 달려든다. 그리고 은빛 물고기들은 마침내 물 위로 뛰어올라, 새가 되어 하늘로 사라진다. 무얼 의미하냐고?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다음 꿈에선 파랗게 변해버린 수연의 모습을 본다.
꿈들 사이사이로 주치의가 다녀가곤 했다. 하지만 강렬한 이명 때문에 도저히 대화를 이어 갈 수 없었다. 주치의는 하얀 칠판을 가져와 거기다 글을 적는 방식으로 손시정과 의사소통을 했다.
다음 꿈에선 차갑게 식어 그의 품에 안겨있는 딸의 모습을 본다.
자살시도는 당일날에 언론에 보도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세계적인 스타였으니 당연히 세계적인 뉴스가 된다. 주치의는 환자에게 안정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하얀 칠판에 뉴스 이야기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스스로도 자신이 뉴스거리가 되었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혐오스러웠지만, 이미 거기에 익숙해졌다: 뉴스거리.
그렇다면 옆으로 돌아누워 잠을 청하는 것도 ‘뉴스거리’가 될까?
며칠 후 주치의는 고막 파열이 심하다고 판단하고 조직을 고막 구멍에 이식하는 고실 성형술을 시술한다. 감염을 막기 위해 장기입원을 권장한다: 손시정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날 꿈에선 맨손으로 딸의 무덤을 파낸 그날을 생각한다: 이미 엉망이 된 살덩어리를 품에 안고 있다.
매니저는 언론 때문이라도 당분간 손시정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얀 칠판에 적는다. 손시정은 매니저에게 검지와 엄지로 작은 원을 만들어 보인다.
딸이 처음 두 다리로, 소파에서 안방까지 걸어가던 순간을 기억한다.
며칠 후에 정우령 회장이 그를 찾아왔다. 손시정은 그가 시달리고 있는 꿈의 일부라고 확신했다. 30분 정도 회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꿈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떤 꿈도 이렇게 길진 않았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병상에 걸터앉아 회장을 맞이했다. 모든 면회를 거절하겠다고 밝힌 상황이었지만 세브란스 병원의 실질적인 오너였던 정우령 회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우령 회장은 비서를 동반하여, 그가 한 말을 하얀 칠판에 적게 했다. 비서들 중에 가장 예쁜 손글씨를 자랑하는 비서가 아름다운 필체로, 정우령 회장이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던지는 말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칠판에 적어 내렸다. 마침표도 빠짐없이 예쁘게.
이미 이명이 다소 가라앉은 상태여서 정우령 회장의 말을 들을 수 있었지만 비서가 민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귀가 들리지 않은 척을 했다. 그러곤 칠판을 읽고 나서야 정우령 회장의 말을 이해한 것처럼 입을 껌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