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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덕중 Jan 08. 2021

질주의 역사 - 10

숲 속의 건물

10/ 숲 속의 건물





가우재는 '몽상'의 복제본이 텅 빈 수조 속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지켜본다.


천천히 하강하는 크레인. 엔지니어가 미리 입력해놓은 값에 따라 움직인다. 천천히, 일관되고 차분하게: 모든 계획은 완벽하다: 모든 계획은 완벽해야 한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어야 했다. 삑삑 소리와 함께 크레인이 멈춘다. 몽상은 지상 30cm 높이 정도에 멈춰있다: 가우재의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 물에서 올라온 물고기. 


이제 기술자들이 나설 차례다. 몽상을 감정소의 메인프레임에 연결한다: 가우재는 직접 장갑을 끼고 몽상으로 다가선다: 실무적 필요성보다는 감정의 충동에 따라: 나는 이 물고기의 어머니다: 젖을 물리는 것이다: 물릴 것이 많다: 케이블 179개를 모두 연결하고 테스트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테지, 가우재는 다음 프로세스를 생각한다: 수조에 냉각수를 채우고, 냉각 시스템을 테스트한다: 1차 가동 후 냉각 시스템의 작동을 재확인: 프레임과의 연산 동기화 테스트, 2단계로 가동: 감정소 동관 인터페이스에 연결 -> 그게 끝나면 이제 물리적인 공사만 남는다: 지붕을 올리고 그게 굳기를 기다리는 지루한 절차. 물리적인 현상을 가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그게 한참 걸릴 것이다. 콘크리트가 굳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정말 한참이 걸리겠지. 하지만 그러한 지체는 예상 가능한 것이지. 적어도 공사기간은 정해져 있지.


'해답'을 찾는 데까지는 정해진 시간이 없다. 감정인이 이 질문을 푸는 데는 걸릴 시간은 이 '온실'을 짓는데 걸리는 시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 


아니, 감정인이 질문을 푼다고 할 수 있을까? 잘못된 표현이다: 질문을 푸는 것은 몽상이다.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


파란빛이 감도는 냉각수가 수조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몽상은 꿈을 꾼다: 몽상은 꿈을 꾼다: 답을 헤맨다. 계획은 그렇다: 완벽한 계획: 알파 OS의 족적을 쫓는 것이다. 그 부분은 인간의 영역이다. 한 인간. 그녀가 마땅치 않아하는 사람:


가우재는 공사장 한편에 안전모를 쓰고 멍하니 서있는 손시정을 흘겨본다: 저 멍청이라니.


-


<본건의 쟁점>


(1) 과연 ‘계율’이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윤리 레버의 조정에 따라 계율은 운전자를 살리기 위해 다섯 명을 죽도록 결정하고 있다. 그리고 계율은 (원고의 말에 따르면) ‘비열하게도’ 그 책임을 운전자 개인의 윤리적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윤리 레버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나쁜 알파”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중립적인가. 과연 ‘계율’은 알파 OS가 마주칠 무한히 많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서 모든 준비가 되어있는가.


(2) 설령 ‘계율’이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계율’의 내용이 알파 OS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가. 


(3) 설령 알파 OS가 계율의 내용을 완전히 반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알파 OS가 언제나 그 내용을 완전하게 구현할 수 있는가. 프로그램 상의 오류가 없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는가…


-


고인겸 변호사는 주장한다: 


"계율의 윤리성은 회사가 투입한 시간과 인력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R&D에 돈을 많이 썼다는 것이 개발의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R&D에 막대한 자금을 투여하고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프로젝트는 수두룩합니다. 돈 썼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게 아닙니다. 원래. 그런데 피고는 돈을 썼다는 것만 증명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의 쟁점은 알파의 윤리성이 아니라 알파의 합법성이고, 회사가 말한 계율이 합법인지 불법인지에 대해서는 법률해석의 영역이지, 사실 입증의 영역도 아닙니다. 그런데 뭘 증명하겠다는 건가요?


계율이 알파 OS에 반영되었느지, 알파 OS의 운영에 오류가 있는지 역시도 의심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아무런 위험도 없는 상태에서 차량 스스로 절벽을 향해 뛰어들어 탑승자가 사망했고, 이건 피고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이게 어떻게 윤리적 결정이 될 수 있는가? 계율의 첫 장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로 원칙으로 시작되죠, 그리고 사람의 죽음을 허용하는 수많은 예외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건 사실에 어떤 부분이 그 예외에 있다는 거죠? 


질문은 이겁니다. 도대체 절벽으로 뛰어든 알파 OS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무슨 ‘윤리적 판단’의 결론이 김민주의 사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왜 죽었는가?"


재판정에서 명예원 판사는 원고가 제시한 3가지 질문을 언급하면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 법원이 이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언급하면서, 이 쟁점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명예원 판사는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은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적어도 김민주 사건 발생 당시에, 사고차량에 탑재되었던 알파 OS가 계율의 내용을 반영하는지, 알파 OS의 알고리즘에 오류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사고 당시 알파 OS의 판단이 어떠한 알고리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판장은 알파 OS의 알고리즘을 재현할 것을 요구했다.


감정인 문제로 돌아온다: AI에 대한 인증기관이 없는 상황에서 재판장은 감정인으로 GFIAT 그룹, 니콜 모터스 그룹, 그리고 손시정을 제시했다. 피고 측 변호사들은 다시 한번 감정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명예원 판사는 친구들의 말을 끊었다:


"‘법원’이 이미 감정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감정 여부가 아닌 감정 절차에 대한 의견만 제시하길 바랍니다."


피고 측 변호사들은 마지못해 아무리 사건이 중요하더라도 경쟁업체에게 영업비밀을 공개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발했다: 그들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손시정.


"검토 후에 감정인을 결정하겠습니다. 재판은 속행, 재판기일은 추후 지정하겠습니다." 명예원은 이미 명령문에는 손시정의 이름이 적어두었다. 하겠다고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명예원은 다음 사건번호를 호명하다가, 잠깐 언급할 것이 있다는 듯이 호명을 멈추고 법정 밖으로 걸어 나가는 변호사들, 아니 그녀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 그녀의 목소리에 차가운 분노가 서려있었다. 


말을 때려는 순간 그녀는 분노가 가슴을 때려오는 걸 느낄 수 있다: 오랜 친구들이 그들의 우정을 비열하게 이용한 것에 대한 분노.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제2조에 의하면 1억 원 이상의 뇌물 증뢰죄는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 잘들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


감정소는 동관, 서관 2개의 동으로 나뉘어 있다. 동관에는 '몽상'의 복제본이 설치되어 있었고, 서관에는 감정인의 생활공간과 업무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감정인은 오직 서관에 설치되어 있는 인터페이스 장비를 통해 '몽상'에 접근하게 된다.


감정하는데 필요한 고성능 컴퓨터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서관에는 알파 OS의 시뮬레이션을 위한 장비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는 장비는 보안을 위한 것이었다. 물리적인 보안은 물론이고, 회사는 해킹에 대비하기 위해 연구소에 있는 네트워크 보안설비를 그대로 감정소에 똑같이 구현했다. 심지어 저장장치에서 나는 소리로 정보를 빼내는 이른바 ‘디스크 필트레이션’에 대비해서 두꺼운 방음벽까지 설치했다. 이 부분은 정말 낭비였는데, 모든 저장매체는 SSD를 사용했기 때문에 하드 소리로부터 정보를 빼낼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감정 사항: 계율이 알파 OS에 구현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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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시스 특별 기획 기사 “세기의 소송, 정우령 회장의 결심” 중


소송 자체를 기각시키기 위해 회사가 유형, 무형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은 이미 회사 내에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회사 관계자들은 이미지 타격, 신차 출시 지연으로 이어지는 이 ‘세기의 소송’이 회사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는지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엉터리 판사가 엉터리 소송에 꽂혀서 세기의 혁신을 좌절시킨다”는 볼멘소리를 이해 못할 것도 아니긴 했다. 


아직 매출이 없는 회사로서는 소송의 승패와 관계없이, 소송의 존재만으로 회사의 존속이 영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회사가 그토록 피하려던 감정 명령이 떨어지자 오히려 회사가 적극적으로 감정절차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대응이 180% 바뀐 것이다. 그 결정에는 정우령 회장의 자존심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회사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정우령 회장은 오히려 감정절차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알파 OS에 하자가 없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직접 감정인으로 선정된 손시정을 찾아가 손수 객관적 감정을 부탁하기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그렇게 한국 사법 역사 상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법원 감정절차에 별도의 감정소 세운 것이다. 이 역사적 감정소 건축공사는 2031. 7. 20. 에 마무리되어 감정인 손시정의 입주를 기다리고 있다. 공사비는 모두 피고가 부담했고, 재판 후에 감정소 자체는 법원에 기부 채납하는 조건이었다. 법원이 이걸 어디다 쓸지는 예상하기 어려운 노릇이기는 하다.


감정소 내부 구조나 설계에 대해서는 극도의 보안이 이뤄지고 있어, 본 기자도 이에 대해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일반에 알려진 것은 모두 외관에 관한 것이다: 약 800평에 이르는 거대한 감정소에는 창문 하나 없으며, 출입을 통제하는 생체인증 보안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어 출입을 통제한다. 이 ‘비밀의 문’은 오직 걈정인 손시정과 담당 판사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디.


-


손시정은 이미 수년 전에 알파 개발에서 손을 땐 손시정은 자신에게 감정절차를 수행할 전문성이 없다는 것을 회장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정우령 회장은 김수지 비서에게 칠판에 “김학주 팀장을 생각해서라도 감정을 꼭 맡아주게”라고 적게 했다. 손시정은 칠판을 보고 나서야 이해하는 척 입을 껌뻑거리는 연기를 하고서는, “전 김학주 팀장님이랑 그렇게 친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대답했다. 정우령 회장은 노여운 표정으로 손시정을 노려보면서 병실을 나갔다. 


"자네 하게 될 거야. 자네가 하게 될 거라고."


손시정은 감정인 신문기일에 법정에 출석하여 자신에게 감정절차를 수행할 전문성이 없다는 것을 명예원 판사에게 실토했다. 감정인 선서까지 한 마당에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게 무슨 얘들 장난도 아니고... 이 업계는 1년만 현업에서 멀어져도 전문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회사에서 달려들어서도 풀지 못한 문제를 저보고 풀라고요?"


"판사님, 솔직히 이 자리에 제가 왜 불려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랑은 이제 끝난 일이고 아무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이건 제 커리어 계획에도 방해되는 시간낭비입니다!"


"무슨 계획이었는데요?" 고인겸이 물어본다.


손시정이 매섭게 변호사를 노려보면서 소리친다: "저는 죽을 계획이었습니다!"


재판정에 웃는 사람은 없다. 명예원은 손시정의 침착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명예원 판사는 그녀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묻는다: “다시 공부할 시간을 주면 감정절차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기업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을 다른 경쟁사에게 감정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국토교통부에도 감정을 할 만큼 알파 OS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까지의 회사 퇴직자는 손시정과 김학주뿐이었다. 재판장의 입장에서도 그가 유일한, 합리적 선택지였다.


손시정은 그때까지도 작은 이명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은 웅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시정에게 전달되었다. 손시정이 말이 없자 명예원은 다시 한번 물었다.


“다시 공부할 시간을 주면 감정절차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손시정은 물 위로 올라가는 은빛 물고기들을 떠올렸다. 다시 공부한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한다. 다시 살아간다. 언젠가 심심풀이로 시청했던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소용돌이를 치는 물고기들, 살아가는 것은 단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면 괜찮습니다.” 손시정은 나지막이, 마치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것’이요?” 명예원 판사가 물었다.


“한다고요.” 손시정이 대답했다.


감정소가 짓는 데에는 4달이 걸렸다. 손시정의 준비는 상대적으로 간단했다. 4달 동안 공부한 자료들을 출력한 자료(외부 전자기기는 핸드폰을 포함해 일체 반입할 수 없었다), 갈아입을 옷들, 그가 좋아하는 배게, 칫솔, 샴푸 같은 세면도구, 통기타 하나를 클래식 GX 트렁크에 담는 걸로 끝이었다. 


결국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것들은 트렁크 하나로 압축될 수 있는 것이다.


감정소 인계를 위해 법원 쪽 사람들과, 원, 피고 변호사, 시설을 인계할 회사 측 관계자가 감정소 앞에 모이기로 했다.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감정소 주위는 깨끗하게 정리되었고 나무들은 높았다. 빨간 잎들이 바람에 온몸을 흔들고 있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손시정은 차에 기대어 서있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불과 며칠 전 오구연이 재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낼까 한참을 망설였다. 오구연이 병원에 찾아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면회를 거절한 건 그였다.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칠판에 쓰인 글을 통해 그녀와 얘기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그가 그녀를 거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어떤 부분을 고칠 수 있었다면, 그가 조금이라도 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관계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변하지 않는다. 잎들이 떨어지지만 그건 봄이 오면 다시 똑같은 잎이 되어 피어나는 것이다.


아이가 막 걸음마에 익숙해졌을 때였지. 그걸 작은 배터리 하나가 망가트린 것이다.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배터리 하나를 삼켰다는 것만으로. 그 배터리가 어디서 떨어져 나온 건지 온 집을 헤집고 다녔지만 끝내 알 길은 없었다. 굴러다니는 리모컨? 장난감? 어디다 쓰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소형 가전? 그리고 이제 뿌리를 잃은 그 아이는 이 잎들처럼 피어오를 수 없다. 그 아이는 낙엽처럼 바스러지고, 돌처럼 잠들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손시정은 이미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이기 싫어 나무가 있는 쪽으로 뒤로 숨었다. 법원 쪽 사람이었다. 하지만 차가 서 있으니 그가 와있다는 것도 알 것이다. 손시정은 소매로 얼굴을 닦고 걸어 나왔다.


“판사님, 안녕하세요.” 손시정이 말했다. 숲 속에 서있는 여자는 재판정에서 보았던 엄격한 판사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판사님 혼자 오셨네요?”


“네, 실무관은 따로 오기로 했습니다.” 명예원이 말하면서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한데 움켜 잡아 머리끈으로 묶었다. “일찍 오셨네요?”


“예상보다 가깝네요. 판사님도 일찍 오셨네요?” 


“네, 네비보다 빨리 왔네요.” 명예원이 대답했다. 시계를 보니 모이기로 한 2:30까지는 40분 가까이 남았다. 일찍 도착하면 차에 앉아 노트북으로 밀린 판결문이나 쓸 생각이었는데, 설마 자기보다 먼저 도착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색했다.


“저… 혹시 제가 먼저 짐을 꺼내놔도, 그 법적으로 괜찮은 건가요?” 손시정이 물었다. 


“법적으로요? 차 트렁크에서 짐 꺼내는 건 법적으로 아무 문제안됩니다.” 명예원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도와드릴까요?”


자료들을 실은 가방은 꽤나 무거워 두 사람이 같이 들어야 했다. 배기구가 명예원의 눈에 띄었다.


“이 차 휘발유네요?”


“제가… 배터리 들어간 건 다 별로여서요…”


슈퍼스타 손시정의 비극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명예원은 괜히 말실수를 한 것 같이 느껴졌다.


“미안해요.” 명예원이 말했다. “힘드신  거 아는데… 제가 괜한 일을 부탁한 것 같아서요.”


손시정은 대답 없이 마지막 짐을 들어 올려 입구 앞에 옮겨 놓았다. 그는 별 말없이 명예원을 보았다. 눈이 부어있었다.


“아닙니다. 이걸 맡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시간이 되자 법원 관계자, 고인겸을 비롯한 변호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가우재를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은 버스를 타고 왔다. 재판장과 변호사들의 입회 하에 감정소에 대한 최종 점검을 시작했다. 형식적인 절차였다. 기술적인 검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소에 감정인의 중립에 영향을 줄만한 물건이 있는지 양측 변호사가 확인하고 이를 기록하는 절차였다. 물론 세상에 그런 물건이 있을 리 없다. 담당자가 자랑스럽게 감정소에 적용된 최첨단 기술을 설명하고, 가우재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나머지 일행이 감탄하는 식으로 절차가 이어졌다. 정작 여기서 살아야 하는 손시정은 한편에서 핸드폰 시그널이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허사였다. 


“외부연락용 휴대폰은 따로 지급될 것입니다. 저희가 특별히 설계한 휴대폰입니다만… 별건 없고 패킹 기록이 법원 서버에 보관되는 기능이 추가되었을 뿐입니다.” 담당자가 손시정에게 휴대폰을 건네면서 설명했다.


“안드로이드잖아, 난 아이폰만 쓰는데…” 손시정이 투덜거렸다.


“손 연구원,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일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가우재가 끼어들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어요? 차 팔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손시정이 손 안에서 핸드폰을 돌려보이면서 대답했다.


관람이 끝나고 다음은 생체정보 등록이다. 감정소 보안시스템에는 지문, 장형, 망막 스캔, 홍채인식과 혈관 스캔을 모두 사용했다. 등록 절차는 길고 지루했다. 손시정에게는 이미 익숙한 절차였기 때문에 덤덤하게 스캔 기기 앞에 섰다. 판사는 약간 어색해했다. 법령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이게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차적으로는 손시정만이 감정소 출입이 가능했고, 명예원에게는 출입권한이 없었다. 손시정이 감정인 임무에서 해제된 경우에만 재판장에게 권한이 돌아온다. 말하자면 명예원은 일종의 ‘백업’에 해당하는 것이다. 


“담당 판사가 바뀌면 그때는 새로 등록해야 합니다.” 담당자가 설명했다.


이제 인계만 남았다. 변호사 입회하에 출입권한을 손시정에게 넘기고, 서로 인계서에 서명하면 긴 절차도 끝이다. 2시간 정도 걸릴 예정이었지만 관람 덕에 3시간이나 걸렸다. 


그때 감정소 밖에 정우령 회장이 도착했다.


“시정 씨, 잠시 담배 한 대 피울까?” 정우령이 감정소에서 걸어 나오는 손시정을 보며 말을 건넸다.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님!” 고인겸이 딱딱하게 말했다. “피고 관계자와 감정인이 사사로이 의견을 교환하려는 것은 감정의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럼 같이 가서 피세요.” 명예원이 피곤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전 담배 안 피웁니다!” 고인겸이 따져 들었다.


“…피고 대표는 감정인과 사사로이 의견을 교환하는 행위를 삼가세요.” 재판장이 명령했다. “됐죠?”


“지금 담배 못 피우게 하면 감정인 그만두겠습니다.” 코미디를 보다 못한 손시정이 끼어들었다. 결국 고인겸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회장과 손시정은 잠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미 떨어진 잎들이 발 밑에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남자들은 말이 없었다.


“할 수 있겠어? 중립적으로?” 50대 초반, 하지만 벌써 머리가 희기 시작한 회장이 물었다. 


“중립적으로요? 제가 몸 담았던 회사인데 100%가 되겠어요?” 손시정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야야, 산불나, 불 꺼.” 회장이 질겁하며 말했다. “아, 네. 그렇네요.” 손시정이 담뱃불을 나무에 비벼 끈다. 민망했다.


회장이 멈춰서 손시정을 돌아보았다. 


“내가 하나 당부할게. 100% 중립적으로 해줘. 학주를 생각해서. 철저하게 검증해주게… 그게 그 친구를 위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질문을 해결해야 해. 자네가 아니면 이걸 해결할 사람이 없고. 정말 문제점이 있으면 내가 가장 알고 싶네.”


“우리 모두 계율대로 한 거잖아요… 그게 우리의 최선이었고,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랬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을 고안해서 그거대로 한 거였지. 그런데도 학주가 가고 만 거야.”


“... 그렇게 가시면 안 될 일이었습니다.” 손시정은 감정소를 바라보았다. 사람들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회장님… 제가 이런 말씀드리기는 좀 그런데 회사에서 이런 사건 끝내려면 쉽게 끝낼 수 있지 않아요? 김 팀장님 따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회사 입장에서 유쾌하진 않으실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하자는… 아니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네. 난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네. 김 팀장이 나한테 이 문제를 가져온 적이 있었어. 난 그걸 외면했지. 난 지금에 와서야 그걸 후회하고 있고. 김 팀장에게 그걸 알려주고 싶은 거야. 그 친구가,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 그걸 자네가 철저히 검증해주게, 거짓 없이, 가감 없이, 빈틈없이.” 회장이 강조하며 말했다.


해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야 했다. 


“얼마 들었어요? 저거 짓는데?”


“얼마 안 들었네, 토지나 이런 건 원래 국가 소유이기도 하고… 그리고 대부분 회사 리소스에서 나온 거긴 하고, 몽상도 실제 제작이나 설치는 그렇게 비싸진 않네.”


“그래서 얼만데요? 제가 살집이.”


“30억.” 회장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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