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1/
어디로 떨어졌던가, 너, 처마를 두드리고, 어디로, 주름진 손가락을 타고, 떨어지면, 네 첫마디는 낯설고 아프다. 차가운 손가락들, 소리와 의미에 둘러싸인, 너, 무거운 향기, 침묵 같기만 하고, 떨어진다.
떨어진다 넌, 거리와 가로수, 잎들, 깜빡이는 신호등, 물고기 같은 조약돌들, 위로,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나, 이제 겨우 잠든 여인을 깨우고, 거기서,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을 것 같은 흐린 오후, 아무것도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너는, 마침내 회색 해안에 몸을 던진다. 모래가 튀어 오른다. 온갖 색을 어지럽히고, 짙게 하고, 흩어지게 하고, 신경질적인 화가, 네가 오갈 때, 지나는 자동차 소리마저 파도 같다, 엔진의 열기를 식히는 너, 연기를 가라앉히는 너, 나의 창가에 회색 바다를 그리는 너, 나는 창가로 걸어 바다를 확인한다; 나는 여자다, 나는 나를 확인한다, 그럴 때마다, 바다는 멀어지고, 너는 떨어진다, 창문을 스치고, 비둘기 날개를 적시고, 깜짝 놀란 새들이 습격을 피해 날개를 펴고, 사람들은 우산을 펴고, 이제 막 젖기 시작한 신발들을 들어 올린다.
너는 차갑고 갑작스럽다, 창가엔 수많은 흔적들을 남기고, 그러다 금세 사라지고, 눈물 같은 것들을 남겨놓고 아무 변명도 하지 않는, 너, 창문에 흐르면, 널 보는 눈동자엔 수많은 상들이 그려지고 흩어져 깜빡이는데, 너는 기억되는데, 너는, 어떤 기억 속에서 너를 보는지 묻지 않고, 다만 떨어지고, 침묵하고, 나, 너를 듣고자 하는 여자, 키 작은 여자, 구두도 신지 않았다, 나는 맨발로 서 있다. 나는 유리창에 온몸을 기대고, 내 옷자락이 그 위에 흩어지도록 한다; 유리에 귀를 붙인다, 고동을 듣기 위해, 수많은 세월 네가 내게 던져온 말들, 그리고 나는 기억한다: 태어나 처음 맛본 쓸쓸함을, 처음 맛본 우유의 맛을, 너무도 오래전에 너는, 너의 그림자 속에서 얼굴들을 찾고 있는, 여인에게, 어떤 추억들이, 어떤 고집이 그녀를 망가트려놨는지 묻지 않는다; 그것이 일종의 예의라도 되는 마냥, 무엇 때문에 여기에 서있냐며, 왜 떨어지지 않은 채 난간을 쥐고 있냐고, 왜 흘러내리지 않냐고, 설명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는다, 너는 말하지 않는다, 너는 모든 입술을 부서트렸다, 주먹으로 치마를 쥐고, 그걸 작은 공으로 만들어 움켜쥐어도, 그 많은 소리를 내어도, 퉁명스럽고, 네가 우산을 두드릴 때, 오후에 잠든 잎들, 고독에 부서진 돌들, 창처럼 곧게 선 꽃잎들, 시간이 앗아간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머물렀던 걸까, 그녀는 누구였는가, 무얼 수색하고 있는가, 저만치 먼 곳엔 간판이 깜빡이고, 마른 고양이들, 지붕 위를 통통 튀어 다니는, 하나 둘 켜지는 조명들, 밤손님들이 술집 아래로 들어간다, 신발은 저만치에 벗고, 술잔에 너를 담는다 - 너는 떨어진다, 너를 주장하고, 너를 표현하고, 그것이 너라고, 너는 존재하려 든다 - 머리 위로, 머리카락 사이로, 무거운 향수 위로, 그래서, 우산 아래 얼굴을 숨긴다, 검은 우산, 작은 보폭들, 빗소리에 목소리를 숨긴다, ‘어디로 갈까요?’ 하고 물었던가 아니면 ‘어디가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가, ‘어디로 가야 할까?’ 그가 말했을까 ‘비가 오니깐, 일단은 어디든 가야겠지’ 망설이고, 결국 질문 하나 던지지 못하고, 지친 걸음은 어디든 가고는 했다, 이제 돌아가야 할까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보면서, 시간을 기다리면서, 비를 기다리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고, 그것들을 말하지 않으면서, 차마 말하지 못해 기억하면서, 기억하지 못해 손금에 새기면서, 태어나지 않은 영혼의 말들, 말할 수 없는 존재들, 존재가 되려다 만 것들, 너무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외면하고 사랑하고, 오직 그것뿐인 냥 키스하고, 그게 다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서로를 기다리며 서로의 손에 닿으려는, 파도처럼, 부서지지 않는 파도처럼, 서로에게 이르려고, 그리고 서로에게서 멀어지려고, 파도에 뛰어오른 모래알처럼 달려든다, 사랑하며 흩어진다. 흩어진다. 빗방울에 젖어 찢어진 노란 광고지들, 낙엽들, 생각들.
너는 두드린다, 그 침묵을. 어깨 위에, 우산 위에, 남겨진 모든 것들 위로, 떨어지면서. 흩어질 때는, 병든 낙엽처럼, 철 지난 신문 사설, 검은 활자들, 꽁초들과 이제 막 하루를 마친 스포츠 석간. 너는 두드린다 ― 빈 손가락들. 현 없는 피아노를 두드리는 손.
눈썹을 만지고 인중을 만져보았어, 그래, 이제 어디든 제멋대로, 통통 소리를 내고, 탁탁 소리를 내고, 귀 기울이면 언제나처럼 조금은 불안을 느낀다. 나는 낮은 곳에 살고 있으니깐, 지하실에 남겨진 마지막 아이, 죽겠지, 죽겠지 비가 많이 오고 그래 하수구가 검은 물을 뱉어내고, 전기마저 끊긴 곳에서, 세상의 소리조차 잊힌 곳에서 쥐처럼, 영원히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잠들다 죽으리라; 그것이 나의 종말이 되리라, 파도를 들으면서, 소파 위로 흩어지는 머리카락들 언제던가 언젠가 여기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너는, 검은 곱슬머리, 조금 취한 채, 어스름에 너의 눈과 시선을 숨기고, 나를 보았다, 나는 너의 공동을 찾고 있었고, 너는 나지막하게 노래했지. 왜, 하지만 왜, 왜, 너는, 이유를 찾는 습관, 생각들, 질문들, 말하지 않았다, 오후에 압도된 나는 거기에 멈춰있고, 너는 일어나 피아노를 치고 갑작스럽게 나가버렸다. 그러나 왜 기억하지 못할까 왜, 왜 그렇게 너, 비를 따라 건반을 누르고, 몇 분 째 아무 말하지 않고, 침묵을 늘어뜨리고, 회색빛 오후에 반짝이던 너의 바지, 너의 우산, 넌, 그리고 난, 그리고 끝내 이렇게, 쥐처럼 잠들면, 못할 거야 내일도 무릴 거야 오늘도 그리고 저녁은 방안까지 찾아오고 오늘도 빨래를 하지 못했어 하면서 자신을 책망하고, 남몰래 너를 원망하고, 나가지 못할 거야 영원히, 머물겠지 나는 내 모든 걸 안고, 그리고 네가 남긴 피아노의 하얀 건반을 누르며, 거기에 쌓이는 먼지를 세며, 내 모든 소유와 기억을 안고, 망각과 후회를 경계하면서, 의심하면서, 내 방에.
내 양말들과 속옷들이 잠든 곳 이곳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아무도 오지 않는 섬에 유배된 여인 버림받은 여자 언젠가 거울을 향해 소리를 내어 말했지 너는 버림받은 여자라고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잊히고 마는 저녁들처럼 아무도 내 얘기를 하진 않겠지 않을까 잠들까 아니면 소나기일까 비 그치면 젖은 보도블록 밟고 나는 눈으로만 그래 마치 눈만 존재하는 것처럼 헤매다 돌아다니다 저녁이 남겨둔 늦은 빗방울들 베란다 끝에 매달려 있고 가지 끝에 내 눈으로 떨어진다 머리카락 위로 빗소리를 듣는다, 머리를 묶는다, 내 숨결을 들으면서 가로수에 늦은 빗방울들, 을 듣는다, 그들이 떨어지는 걸 들어, 나쁘지 않아 비 온 뒤의 비린내 젖은 불빛, 몸 없는 영혼처럼 가로수 사이를 거닐고 싶어, 싶었어 내 방에 아직도 너의 온기가 머물러서 일까 그러나 무엇이 너의 것일까 어디든 앉아, 찻잔을 들고, 그래 세계를 그 속에 담고, 그 속으로 떨어져 주름들을 남기고 내 찻잔에, 얼마나 많은 무늬가 담겨 있는지 떨어지면 세상은 온통 너로 물들고 너의 울림들 그리고 울림들이 사라지고 나면, 너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될까, 그러면, 너 존재하기를 멈추면, 더는 너를 상상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게 될까, 돌연히, 환영처럼, 아무 흔적 없이, 유서 하나 없이 그리고 흉터 하나 없이 - 그럼 너는 거짓일까? 내 단단한 찻잔, 내 단단한 손톱만이, 진실일까? 이것만이? 내 안에 확실한 것은 이름뿐이다 나는 낮은 곳에 살고 있어, 나의 주소는 여기,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제일 먼저 죽고 말겠지, 하는 걱정들. 그렇게, 생각들, 걱정거리들, 그리고 생명이 사라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기억이 되어 가로수 사이를 맴돌 것이다, 잊혀, 빗방울처럼 흩어지고 만다면, 하는 걱정들.
2.
손가락들 만져보았어, 나의 것, 손가락들, 열 개, 내일이면 구석구석 먼지를 쓸어낼 여인, 습관처럼 기침하고, 그릇에 묻은 먼지를 씻어 내리라, 홀로 밥을 차리고 잠들고, 설거지하다 틀어놓은 수도꼭지만 매섭게 거실에 울리면, 그리고, 그리고, 말을 더듬다 시계를 찾아내 그게 언젠가 어디쯤에서 멈춰버렸다는 걸 발견하겠지. 어디를 가리키는지 나는 볼 수 없다. 오후가 지나간다. 시간은 여기를 맴돌고, 가만히 인중을 눌러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내가 간직한 유일한 비밀인 냥, 늦여름 유채꽃들 빗방울에 흔들린다, 이젠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여문 나뭇잎들, 마치 한 번에 쓰러질 듯, 쏟아질 듯 창가에 저 많은 그림자를 던지고, 저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침몰하는 선원들의 마지막 생각, 무겁게 땅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 나를 떠난다, 이제 막 여름을 지낸 단엽들, 추락을 생각하는 낙엽들, 죽음, 죽음을 바라보면서, 한 방울 빗방울이 떨어져, 한 방울 그 연약한 형체를 깨뜨리고, 다른 한 방울 떨어져, 그들을 격추시킨다.
차가 지나가고, 또 한 존재가 베란다 밑을 지나간다, 무게를 짊어진 존재, 온 저녁을, 그들은 베란다 밑을 통과하고, 베란다 끝에 나는 매달려있다 -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본다 - 삶은 통과한다, 처마를 두드리면 눈을 감고 - 처음도 끝도 없는 빗방울 하나, 떨어져, 죽는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었다 - 말소리들은, 골목 사이를 맴돌다 파랗게 빛나는 술집 간판 앞에 멈춘다. 그들은 여자의 눈동자에서 고독을 찾는다, 그녀를 정복할 지름길을 찾는 이리, 파란 지폐들을 세어 누군가에게 건네고, 또 다른 지폐 몇 장을 꺼내 들어 허공에 흔든다, 택시는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 여행하고, 저녁은 비틀거린다.
틀린 가사, 노래하며, 침을 뱉으며, 술을 비우고, 허공에 욕을 던지며. 빗방울 떨어질 때면, 거리 구석엔 쓰레기봉투만 쌓여가고, 그들은 저마다의 편지를 쥐어짜 공으로 만들어 쥐고 있다, 그들의 집 앞에서 서성이다, 아무도 그들을 볼 수 없게, 아무도 그들을 알 수 없게, 몰래 쓰레기봉투에 편지들을 쑤셔놓는다. 현관문이 닫히고 이내 불빛마저 사라지면, 밤은 어깨까지 내려앉아 어둠 속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고, 편지는 잊히고 글씨들은 흐려진다. 승객들을 보낸 택시들은 말없이 눈을 부릅뜬 채, 빈 도시 속을 달려간다. 이름은 소용없어지고, 돈은 하찮다, 역사가 잊히고 빈 수반엔 빗물만 고이고, 오직 침묵과 어둠만이 남아, 검은 나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밤이 오면, 오직 세계만이, 존재한다, 홀로 먼지를 견뎌내면서, 홀로 젖은 꽃잎들을 쓸어내면서, 이 부서 저버릴 것 같은 물질들 사이에서, 마모되지만 결코 깨지지 않는 모습으로, 다만 간헐적으로 기침을 뱉으며, 존재한다, 눈을 깜빡이며, 기억이 끊긴 곳,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이 광기와 고독 속에서도 - 파도가 고독에 부서질 때도, 침대들이 부재에 지쳐 잠들 때도, 세계는 시간을 견뎌낸다.
눈을 감아도 세계는 있지, 고집스레, 의식 없이, 다만 존재만으로 어둠에 파 먹힌 얼굴 하나 유지하고, 텅 빈 병영처럼, 부재로 세계를 지탱한다, 내 허벅지로, 내 두 가슴으로, 부서져 떨어지는 시간들, 시계 눈금 사이로 빗방울 떨어지고, 잠들거나, 꿈을 꾸거나, 이제 빗방울이 세상을 온통 적셔도 놀라지 않고, 지붕은 그저 더 낮게 고개를 숙일뿐이다, 신문은 젖어버리고, 활자는 흩어져 언어는 지워지고, 차는 미끄러진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세상의 아름다움도 더는 없는 거야, 어둠도 비밀을 잃듯이, 잠들면, 이제 더는 ‘오늘’은 없는 것처럼, 더는 ‘지금’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오늘도 아닌 지금도 아닌 시간 속에서, 소리만이, 빗소리만이 세계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다.
묵묵히. 세계란, 바닷속에 가라앉은 배 같은 것, 그 위에 서있는 도시 같은 것, 아스팔트는 갈라지고, 그 틈새들로 어둠이 파고들어 뿌리를 심는다, 세계란, 텅 빈 요람을 흔드는 바람, 오렌지 같은 구형, 벽 틈을 메우는 소금과 어둠, 창문을 두드린다, 한 손으로 세계를 지탱하는 신처럼, 지붕 아래 누워, 그래 온갖 꿈들을 꾼, 그 많은 꿈을 꾸고도 깨어있는, 나는, 촛불을 켠다, 작게 타오르는 불, 이제 이 작은 불꽃만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 그러면 내 발가락들도, 내 방도 정말 나의 것이고, 내 모든 것들 나를 둘러싸고, 나는, 사막의 주인처럼, 정말 혼자 있다.
이 홀로 있음, 부서져 가는 시계와 접시들, 부서져 가는 세계의 폐허에 포위된 채, 이 연약한 인과로 연결된 채, 종의 마지막 존재인양,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오직 익사만을 기다리는 어부처럼. 나는 빗소리를 듣는다.
불빛은 흔들린다. 한 밤 예기치 못한 바람, 불빛을 흔들고 세계는 내 작은 움직임에도 사라질 듯, 동요한다, 깨질 듯이, 커튼의 은근한 움직임조차 두려워하며 몸을 굽힌다.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황소처럼, 동물이나 새의 의식처럼, 세계는 그렇게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 - 흔들린다. 나는 두 발로, 두 빈발, 벌거벗은 발, 행여 불빛을 깨트릴까 조용히 창가로 걸어가, 이제 막 찾아온 가을의 갑작스러운 바람을 만지고, 어머니처럼, 창문을 닫는다. 두 손으로, 기침을 뱉는다. 그리고, 그토록 불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이 어둠의 확실성, 먼지의 확실성에 존재의 창을 들고 대항한다, 항의한다, 방대한 어둠에 대항해 서있다, 황량한 밤바다를 맞서는 등대, 그 아래 빛나는 모든 모래알들처럼, 역사의 존재함을, 역사와 전쟁의 흔적들, 독재자와 노예의 흔적들, 바위와 고독의 흔적들, 인간이 만들어온 결정들의 유물을, 나의 존재, 내 육신의 존재를, 이 불빛은 비춘다, 흔들리면서, 세계의 한 중간에 서서, 인류의 모든 역사를 지탱하면서, 내 육신에 걸려있는 나의 존재를 지탱하면서, 빛보다 더 많은 그림자들을 만들면서, 어둠이 망가트린 형상들, 주전자 속에 흔들리는 손가락들, 얼굴은 무너져버렸어도, 이름은 잊혔어도, 나는 남아, 마른 꽃잎 내음 무겁게 방안을 떠돌고, 소파 너머로 부엌까지 길게 늘어선 어둠, 천장 속에 흔들리는 동그란 빛, 그리고, 그리고, 나는 이렇게 전력을 다해 겨우 존재하고 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바닥을 누르고, 세계에 나를 고정시켜 본다. 시계는 또각이고, 삶의 목소리가 또각이고, 도시는 지속한다, 도시는 회전한다, 빗소리는 영원할 듯 울려오지만, 나는 나의 경계를 유지한다, 병사 없는 병영의 보초, 벼 없는 밭의 파수꾼, 그리고 오직 존재하기 위해 나는 살아왔다, 오직 존재하기 위해 존재했다. 이 고독을 나는 수호해왔다, 성곽을 순찰한다, 밤에 대항하여, 이 고해에 대항하여.
내겐 부서진 침대가 하나 있다, 기억에 부서진 침대, 비어있음에 신음하는 침대, 고독에 망가진 침대, 그 위에 흩어진 먼지들을 주어보았어 - 주전자 소리를 듣고는 불을 끄러 달려간다. 그래 맨 먼저 죽으리라, 낮은 곳에 잠들어 깨어나고, 선미에서 미끄러져 검은 바닷속을 허우적거리는 선원, 오디세우스의 선원, 어둠은 자꾸 내 입으로 들어오고, 전기가 나가면, 어떡해야 할까,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무슨 결심을 하고 있어야 할까,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할까, 하는 걱정거리들, 기억하고, 내 손엔 연필이 하나 쥐어져 있다,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는데 너는 여전히 떨어지고만 있다 나의 손등 위로, 나를 통과하고, 창가로 가 손을 뻗어 너에게 나를 걸어본다 - 그럼 나는 이렇게 걸려있는 것만 같고, 네가 떨어질 때, 쓸쓸히 어린 날 비밀스러운 꿈들을 떠올려 보았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 언어를 네게 보였지. 내 허벅지에 달려들던 털 많던 개, 손바닥 위로 떨어져, 너는, 나의 존재가, 이 손바닥 하나에, 이 회색빛 오후에 매달려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왜, 왜 이것들은 존재해야 할까, 빗방울들 잠든 귓가에 내리면, 왜, 왜 사람들 하나 둘 아무도 모르게 몰래 깨어 육신은 이불속에 누워, 뼈를 견뎌내면서, 손톱을 견뎌내면서, 기억을 견뎌내면서 새벽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기다릴까 무엇을,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연인을 깨울까 울음을 삼키며, 어둠 속, 시간도 공간도 없는 의식 속에서, 다만 이름 없는 존재로, 이름 없는 얼굴 하나를 찾고, 어둠 속 희미한 그림자를 응시하면서, 그 실재성을 의심하면서, 보면서, 목격하면서, 차츰 스스로를 그림자라 의심하면서 - 왜 세계는 새벽을 향해 잠들어야 할까, 잠들어 있을까, 왜, 차들은 정지하고 출발하는데, 어디든 가고, 신호등은 빗속에서도 깜빡이지만, 나는 여기 베란다 끝에 매달려, 창문으로 튀어 오르는 빗방울, 커튼을 적시고, 잔물결들 속에서도, 알지도 못하는 저 말소리들 속에서, 내 이름, 내 낯선 이름,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불리지 못한 그 이름을 기다리고 있을까, 이름 없이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단 한 번도 진실을 모르는 걸까, 왜 이 질문을 멈추지 못하는 걸까, 왜 우리의 기억은 얇고, 종종 흐려져, 친숙했던 것들은 낯설어지고, 낯설던 것들은 친숙해지고, 그러면서도 단 한번 그 이유를 모르면서 살아갈까, 다만 그러기 위해? 삶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연장일 뿐이고, 삶은, 파도가 떨어지면, 해안의 발자국은 지워지고, 기억은 산산조각 난다 - 나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누워서도, 그 많은 말소리 속에서도 대답 하나, 아무 대답하나 듣지 못하는 걸까, 왜 아무리 불러도 이름 하나 내게 떨어지지 않는 걸까. 그러나 빗소리 들려오면, 나는 흙 묻은 빈 수반 같다, 너는 갑자기 내게 떨어져, 나는, 나의 존재에, 너를 담아본다.
3.
네 짧은 기침들을 추억했다. 현을 잡던 두툼한 손가락들 곱슬진 머리카락 검기만 한 두 눈동자, 그리고 내게 떨어지던 온갖 것들 모든 비가 다 내리고 모든 빗방울이 마지막 빗방울마저 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나면 한 때뿐인 저녁도 그리 길던 골목도 우산을 쓰고 훌뿌려지는 봄날 빗방울처럼 나는 웃노라, 찻잔은 식고 우린 어디든 쏘다니고 소나기는 네 셔츠며 내 치마며 모든 걸 적시곤 했어요 그러곤 다시 소나기 소리도 없이 지붕을 적시면 넌 돌연히 내 삶 한가운데 막 깨어난 여름 눈 떨리는 안경 너머 처마 아래 끝없이 쏟아질 것만 같은 장마 같은 삶, 그 구두들을 보고 있었니 그럼 우린 그저 서로를 기다리다 비가 그치지 않네요 하고 고백하겠지 너는 내게 모든 걸 다 말하진 않겠지 내게 말하려 하지도 네게 모든 걸 말할 순 없겠지 세수도 하지 못하겠지 저 밑으로 떨어지는 것들을 봐 봐요 젖은 광고지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서있고 말은 부서질 듯 약하지만, 시끄러운 빗소리 속에서 단 한번, 말했다 네게, 말했어 네게, 등 뒤로 회색 빛 하늘 선연히 파랗게 물들 때 그 햇빛 차차 가벼이 네 어깨를 누르면, 눈을 감고, 우린 내일도 모르고 어제도 모르면서 그저 타닥타닥 소란스러운 빗소리를 듣는다, 왜냐고 너는 물을까, 왜냐고, 물으면 넌 뭐라 말할까, 말할 수 없다.
장마철 아무도 남지 않은 세상에 쏟아지던 빗방울들, 쓸쓸한 세상에 내리던 것들, 우리는 쥐려 했지만 잡을 수 있는 건 너의 팔목뿐, 그것들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흩어져버리면 왜 우리 삶의 한 중간에 누워 있을까 네게 물어도, 우리의 언어는 왜 질문으로 가득할까, 왜 우리만 여기 남아 네 그림자들 자꾸, 내 위로 떨어져 홀로 웃곤 하는데 담배연기 피어올라 불빛들 사이로 흐려져 사라져 버리면 자동차 소리에 흐려지는 연기에 그리고 이유 모를 빗방울에 상처 받은 나는 너에게, 너의 일상적인 침묵에 상처 받은 나에게 너는, 그리고 아무에게도 내 삶을 고백하진 않을 테지 그러지 못하겠지, 네게, 왜 내 심장은 뛰고 낙엽은 떨어지냐 묻지 않겠지, 너를 보면서, 때론 감히 너를 부르면서도, 먼저 너를 깨우진 않겠지, 말하지 않겠지, 그리고 넌 내게 무언가 말해주었는데 이젠 기억나지 않아 빗소리 밖에, 너의 언어는 부서진 가루, 기억, 빛나는 가루들, 파란 유리에 흩어진 밤의 표면.
그런 밤 넌 물음표 모양으로 잠들어 있고, 그 위에 쏟아지던 쌀알 같은 미풍을 보라, 아직 이름조차 없는 아이처럼, 다만 신비이고 네 머리카락은 깃발처럼 흔들렸지, 서랍에 잊힌 사과처럼 달콤한 입술, 내가 모를, 그리고 영원히 알 수 없을 꿈들을 응시하며, 내가 모를, 그리고 영원히 알 수 없는 말들을 그 입술에 담고, 네 숨은 느리고 내 걸음은 얼마나 조용히 네 곁을 맴돌았는가, 네 열 손가락, 그게 거기 있는지 알면서도 새보았어, 잠든 손가락들, 조용히, 그렇게, 느슨히 세상의 역학과 이어져 있고 네가 숨을 쉴 때마다, 내 가슴에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사랑과 슬픔, 그게 지나면 안전하리라는 확신만 내 가슴에 쥐고 소리 없이 창가에 몰아치는 빗방울들, 물음표 모양으로 너는 유리 속을 떠돈다, 밤에는 말이 없는 지상의 섬들, 그곳엔 비가 내리지, 그곳에, 우리는 매일 잠들지.
그러나 너 또한, 끊임없는 망설임의 파편일 뿐일까, 너 또한, 지금은 나처럼, 너만의 사막에 누워, 너만의 불빛들을 보고 있을까, 거기서 얼굴들과 이름들을 그려내면서, 나처럼, 반쯤 흘러나온 눈물을 훔치고, 삶을 기다리면서 옷걸이를 만지고, 젖은 지붕 때로 무너져 내려도, 몸 돌려 누워, 조용히 숫자를 세보면, 다섯 손가락 여길 머물렀을까, 내 몸은 남겨둔 네 길목들을 추억할까, 나의 감촉을, 여기저기 흩어진 나를 보는 걸까, 나를, 조각조각 부서진 파편들을, 네 기억 속에 흩어진 나의 형상들을, 나에게도 낯선 그 모습들을, 지나치는 빛에만 비치는 먼지 하나 빗방울 하나, 그리고 의자 위에 놓인, 저 빈 공간, 저 쓸모없는 공간, 우주 같이 팽창하기만 하는 쓸쓸한 공간, 그 위에 남은 것은 얇게 잘린 사과 조각들,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 포크들, 만기 된 고지서들, 버려진 시구들, 아무 의미조차 뱉어내지 못하는, 껌처럼 종이에 달라붙은 활자, 서로에게 등을 내보이는 옷가지들, 네 기침 울려오고, 짧은 기침들,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기침, 벽을 치는 주먹 같이, 천장을 타고 지나가는 소리 없는 불빛, 지나치는 소리 없는 질문, 왜 우리 삶의 한 중간에서, 이 미칠 듯한 비의 한 중간에서 매일 이렇게 누워있어야 할까, 충돌하는 믿음들, 파도들, 모순들, 넌 시계추에 앉아 흔들리고, 잠들지 못한 뒤척임, 조류같이 밤을 타오른다, 내 머리카락은 먼지 같기만 하다, 내 온몸은 펼쳐진 낙엽 같고, 너 그 끝을 만질 때는, 난 이렇게 누워, 느린 숨소리만 네게 들려주곤 했지, 저 공간 위로 숨을 뱉어내고, 조금씩 숨을 멈춰가면서, 차츰 느리게, 다시 한 조각 공기를 들이마시고, 눈을 감고, 그리고 말없이 말했지: 난 잠들었다고, 넌 혼자라고.
너의 파란 등, 돌아누워 창밖을 보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유리에 비친 빗방울, 너를 훔쳐보던 나의 밤을? 내가 잠들어 있는 너의 새벽을? 멈춘 기계 옆에 내려앉은 낙엽처럼, 네 어깨에 내려앉던 파란 불빛, 차마 말하지 못한 두려움들을 품고, 입술은 밤새 마른 잎사귀 마냥 바스락거렸지, 넌 혼자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기심. 그것은 매일 잠들어야 한다는 것, 가장 외로운 수면을, 너의 곁에서 해야 한다는 것. 너에겐 말할 수 없는 꿈들을, 그런 두려움을 안아야 한다는 것.
악몽에 깨어, 잠들 수 없는 밤의 무거운 공간 위로, 너는 회색 빛 기침들을 토해냈다. 내가 모른 악몽에서 깨어나, 내가 모를 상처들을 만지고 있는 네게, 뻗은 다섯 손가락에 걸려 있던 쓸모없는 말들, 눈썹에 걸려있는 빗방울들 같기만 하고, 너 홀로 다시 기침을 내뱉으면, 내 쓸모없는 열 손가락, 두 손, 벙어리 몸뚱어리에 걸려 있고, 너의 실루엣은, 너의 존재에, 그 공허에 걸려만 있을 때, 빗방울들 변명도 없이 쏟아지고 그럼 한때 새벽만 두드리다 가는 소나기, 텅 빈 건반을 치는 손가락, 너도 가버릴까 생각했지 그랬지 그렇게 빗소리만 가득한 밤이면 저 비는 거리에도 지붕에도 내리지 않고 내 귀에만 내리곤 했어.
4.
그런 밤이 있었다 어둠 속에 떠있는 너, 너의 손목을 들어, 귀를 붙여 맥박을 듣다, 칠흑 같은 새벽 허공 시간이 하나둘씩 떨어지면, 손을 뻗어도 손가락 끝엔 새벽의 먼지들만 묻어나고, 섬처럼, 어둠을 등진 너를 보다 보낸 밤, 너의 푸른 등만이, 고래의 그것처럼, 허공의 바다에 한없이 선명해지던 밤, 네가 뱉어내는 숨결, 네 등의 쓸쓸한 온기가 현관으로 복도로 걸어 나간다, 내겐 빈 신발 두 개만 남기고, 나가서, 끝 모를 도시를 맴돌다, 봄에는 사방에 꽃잎, 여름엔 처마에 걸린 빗방울을 보다 보낸 밤, 네게 말하지 못해 너를 손바닥에 적어두던 밤, 맨손으로 벽을 만지고, 이 단단한 벽만이 나를 담아 둘 수 있을 것 같았어, 말이 되려던 것들이 떨어진다, 떨어져서 흩어지던 밤, 사람이 들어있지 않은, 냄새 없는 두 구두의 무게.
너는 변명하지 않았고 나는 듣고 싶지 않았어, 빗속을 지나간다는 것, 저 많은 사람들이 무관히 우리를 통과한다는 것, 또 지나가면, 종일 가사 모를 노래로 침묵을 채우고 이유 없이 물을 따르고, 머리카락, 물에 걸린 머리카락 하나를 집어 제자리에 돌려놓고, 유채 꽃에 둘러싸인, 빗속의 동상처럼 앉은 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질문을 또 왜 언어는 질문들뿐이고, 내게 남은 것은 내게 남겨져버린 너의 말들뿐일까, 조금씩 침전된 음성들, 그것들을 기억하면서, 기억하며 살아가면, 살아간다는 건 다만 이 기억을 조금씩 늘리는 것만 같고, 사막의 한 점 같고, 때론 끝없이 고독하고, 네 앞을 지나는 한 걸음, 이유 없이 창문을 열다 닫다 다섯 손가락에 걸린 빗방울들, 이유도 모른 채 떨어진다. 그리고 우린 이유도 모른 채 살아간다. 이유 없이 앉아서, 거기서 몰래 단어 하나를 버리고.
목구멍 깊이 잠겨 든 말들, 그리고 삶을 지속한다는 건, 어쩜 그것들을 하나씩 버리는 것, 메마른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내 입술을 누르는 이 무게를 견디는 것, 시계 부저음을 듣고 창밖으로 내민 손가락들 사이로, 어디로 흩어질지 모르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가리키고, 매일 어디로 가는지 행선지가 묘연한 버스를 기다리고, 외투를 입고,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각자의 인생을 입은 채로, 어둠 속에선 죽어버리는 눈동자와 펜에 익숙해진 손가락들로 통과하는 것.
화장을 하고 네 대답을 기다리는 것, 기다리며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나 듣고, 언제고 너는 말하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 너의 손톱도, 네 피부의 메마름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너의 벽에 기대서 있는 것, 너의 침묵에, 의자가 회전한다, 회전하는 곱슬진 머리, 짙은 안구, 회전하는 너의 침묵, 다만 보는 것, 바닥에 떨어져 깨질 것 같은, 고래 같은 너의 침묵을, 그리고 침묵의 발치에서 마스카라는 갈라져 떨어진다, 아려오는 눈썹 한 줌 설탕 같은, 말라 떨어진 립스틱, 입술에 걸려 있는 준비되었고 말해진 말들, 준비된 채 말해지지 않은 것들, 아무렇게나 말해진 말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해 네게만 털어놓은 말들이 있다, 지금은, 다만 침묵이 되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벗어나는 것들.
다시 그것들을 집는다, 너 없는 밤엔 등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 내 안은 바람뿐이고, 육신은 이 본능 하나에 매달려 있다, 말하려는 본능, 존재하려는 본능, 이 모든 게 어떤 의미일 거라 믿고자 하는 본능, 내 안에 손을 뻗어 볼 뿐이고, 언제나, 내 안은 기억뿐이고, 육신은, 홀로, 그토록 선명하게 저녁을 통과하는 것이다.
“안녕 갈게” 하고 우리는 매일 헤어졌지, 저녁의 끝으로, 새벽을 향한 걸음, 나는 살아 있는 것 같지도 않아, 태어나지 않은 영혼처럼, 네게, 네 위로 쓰러져 맥박을 듣던 밤, 그런 밤이 있었지 다만 너를 만지고, 세월의 먼지 손끝에 까맣게 묻어나면, 열 손가락 네 맥박을 찾는다 멈춘 것 같은데, 뛰어오르는 네 고동에 놀라, 창밖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도 놀라, 이유 없이, 허공에 흔들리는 저 잎들, 고동치는 이 심장, 베란다 아래론 삶이 지나간다, 신발들과 양말들이 끈질긴 행군을 계속한다, 내 치마의 모든 주름들은 빨래 줄에 걸린 채 비를 맞고, 삶은 흔하고, 그리고 사랑은 모래처럼 흔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추억에 잠겨 내 아래를 지나가고 가버렸다. 언젠가 네게 물었다, 너는 살아 있냐고, 네게 물었지, 너는 여기에 있냐며, 너는 정말 여기에 있냐고.
“안녕 갈게.” 하면서 돌아선다, 발밑으로 흩어지는 별들을 조사하면서, 매일 같은 헤어짐이 싫었고 꼭 그래야 된다는 게 싫었어, 늙은 나뭇잎들이 허공을 떠돌다 대지에 떨어진다는 것, 조금씩 맞이하는 죽음 같이, 일상의 소음만 날 둘러싸고 광고처럼 모호해져서, 너는, 점점 멀어져 점이 되었고 나는 옷만 남은 것 같이, 가장 약한 바람에도, 흔들리고 때 지난 신문지처럼, 질문하고 대답하고 모호해질 때, 흩어질 때, 전단지처럼, 아무에게나 넘겨지고, 연기와 석간이 도시를 맴돌다, 바닥을 쓸 때, 바닥을 긁어대는 소리, 마침내 셔터가 닫히고 영업이 끝났고 도시는 기침 하나 내뱉고 근거를 잃은 검은 활자들이 내게 말을 걸고, 기억과 욕망을 혼동하고, 단지 그것뿐이고, 나는, 나의 자리는 버스의 한 구석뿐일 때, 삶은 얼마나 큰 침묵인지, 존재하지 못하는 눈물들로 치마를 움켜쥐고 나는 여자라고 항변해 본다, 그래서 긴 머릴 기르며 살아왔다고, 그래서 치마에는 주름들뿐이고, 이 많은 것들로 나를 움켜쥐고 내 것이 아닌 내 그림자를 볼 땐 의뭉스럽고, 목구멍은 네 부재로 잠기고, 그래서, 나는 결코 그 이름 하나 부르지 못한다고.
5.
그래 여름은 가버렸다, 끝내는 작은 비와 함께, 온밤을 내리도록, 너 나를 안고서 얼마나 조용히 깨어있었는지, 소리 없이 지상을 때리는 비처럼, 소리 없이 입술을 만지고, 손가락들 길을 잃고, 얼마나 조용히 너 나를 사랑한다 고백했던지, 수없이, 끝없는 언어로, 너의 모든 경계로, 너의 품속에 들어선 한 여인에게, 어리석도록 조용히, 살아있다고, 그리고 너는 살아왔다고, 바다를 건너고 이 빗속을 건너 내 옆으로 왔노라고, 어깨엔 작은 입맞춤을, 끝없이 쏟아지는 불빛들을 보는 내 두 눈동자, 찾으면, 살아왔다고, 너 또한 나처럼, 이유 모를 이 상처 하나를 안고서, 저 끝없이 빛을 보면서, 언어가 되지 못한 질문들을 안고서, 밤에는 텅 빈 그물에 걸린 나신으로 깨나, 낮이 남겨 놓은 유물들 속에서, 그저 먼지와 다름없이 누운 채로, 살아왔다고, 낮이 지나간 자리에, 네게 남아있는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시간을 기다리면서, 때로는, 시간이 밤을 무너뜨리길 기다리면서, 흩어진 편지들 서랍 한 구석에 쌓아놓고, 거실에 냉장고 소리만 요란히 울려올 때면, 잠든 반찬들 조용히 너를 응시할 때, 살아왔다고, 숨을 내쉬면서, 그리고 다시 숨을 내쉬면서.
돌아오지 못하는 새벽의 배들을 보고 있었어, 너 돌연히 내 이름을 부를 땐, 네 두터운 손가락 내 어깨에 닿으면, 내 머리카락 하나하나 이미 여기에 떨어진 것만 같고, 다시 일어설 수도 없이 묻혀있는 것만 같았어, 파도는 왜 자꾸만 같은 곳으로 떨어지고, 불빛들은 보는 이 없이도 깃발처럼 펄럭이기만 하는지, 그리고 시간은, 세월은, 얼마나 조용히 나를 지나쳤는지, 얼마나 조용히 이 모든 걸 부숴버렸지, 두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불빛뿐이고, 내 것이라 이름 붙인 것들은 모두 그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부서지고 마는 것들, 낮이, 밤이 지나간 자리에, 주저앉은 화분은 더 이상 꽃을 담지 않고, 빗방울 떨어지면 한 줌 진흙마저 부서져 버린다, 형체를 잃은 것들, 물들, 방울들, 이름 없는 것들, 처마를 타고 흐르는 투명한 존재, 밤에는 끝없는 생각에 잠겨있는 것만 같이, 네가 우리를 허무는 걸까, 벽을 가르고 그 틈으로 들어와 낯선 꿈에 빗방울들 떨어뜨리고, 커튼을 적시고 가구들만 요란히 삐걱거리면, 잠들어라, 깨나지 말고 잠들어라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뇌던 밤, 시계는 고집스레 시간을 가리키고 그릇들은 갈라져 가는 것이다.
세월이란 이름의 폭력 앞에 모든 것들이 그저 움직이지 못하는 철학자처럼, 자신에게만 고정되어 멈춰서 있고, 폭우를 견뎌 내는 지붕, 옷들은 미칠 듯한 고독 속에 해지고, 손톱들은 자라나 피부를 관통한다, 새벽을 관통하는 대지의 성기 같은 집들, 끈질기게 형상만을 유지하고, 끝내 빗소리뿐이면, 거기에 남은 것은 두 나신뿐이고, 거기에 확실한 것은 너와 나의 두 이름뿐이다.
너는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내게 왔겠지, 너의 불완전함을 저주하며, 완전히 젖어버린 우산을 집어던지고, 창백한 왕의 유령, 현관에 고정된 채로, 두 눈은 공허를 바라보고, 말을 하려 하지만 언어를 모르고, 준비된 변명들은 떨어져 방바닥에 껌처럼 달라붙는다. 그렇게 이름 모를 상처 하나만 안고서 너는 내게 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여자다, 내게 걸쳐진 모든 것은 그림자일 뿐이고, 세상에 걸려있는 ‘나’라는 여인은, 다만 새벽을 등지고 서있다, 흩어진 단어들과 먼지들, 빗속에서, 서있어, 나는 여기 있어, 네게 줄 수 있는 모든 것과 함께, 부재와 어둠에 침수당한 침실을 경비하며, 빈 초소의 보초, 빈 정원의 정원사, 이 고독들만 안고서, 나는 여기 있어, 너만이 볼 수 있게, 이것들, 두 가슴과 점점 선명해지는 실루엣, 세월이 남긴 긴 머리카락, 이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이고, 네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네 앞에서 내 모든 것은 나신으로 비를 맞는다, 발코니에 서서, 바다를 등지고 네게 내 나신을 보이며 이게 사랑이라며 네게 말했다, 해안의 끝자락에서만 터지는 파도의 하얀 거품, 환영처럼 깜빡이는 허공의 섬들,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니라, 모래일 순 없을까, 얼굴에 떨어지는 갑작스러운 빗방울, 끈질기게 해안을 그리워하는 조개껍질 일순 없을까, 그럴 때, 시계가 갑자기 자신을 쳐다볼 때 시작되는 소나기일 순 없을까, 때때론 허공의 무리가 새벽을 포위하고, 말없이 희망 없이 서로를 키스하고 가버리곤 했어, 그들은 모두 날개가 있어 날아다녔어, 아무도 서로를 기억하지 않았어, 아무도 잠들지 않아 아무도 꿈꾸지 않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아 아무도 추락하지 않았어, 그들은 각자의 거처에 누워 서로를 추억했겠지, 이름 없는 것들에 이름을 남기고, 낯선 이와 잠들려 애쓰면서, 빗방울이 잠들려던 그들을 깨우면, 우리처럼, 그들도 그 빗소리 속에서 이름 하나를 찾고 있을까, 허공에 떠있는 섬들, 골목마다 들어선 도시의 섬들, 그곳에도 비가 내리는지, 그래 모든 곳에, 버려진 편지들을 적시고, 활자들을 찢어가면서, 허공에 떠있는 표지판 위로, 빗방울 하나 떨어져 터진다.
그러나 나는 바위처럼 인내하면서, 코끼리처럼 생존한다, 내 안은 뜨겁고 오직 그게 나를 살아있게 한다, 나는 여기 있어, 그리고 나는 살아왔어, 이렇게.
너는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내게로 왔지, 두 어깨를 잡고 내 이름을 불렀다, 수도 없이, 마치 그게 네가 아는 유일한 단어 인양, 한 육체를, 한 부피를, 이름 없는 한 조각 어둠을 밤새 두 손에 쥐고, 그것에 이름을 주고 세상의 주소를 내주고, 어디도 떠나지 못하게 너의 품으로 끌어들이고, 빗방울처럼, 내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세상 가장 고독한 생물 인양, 너는 너의 것을 꺼내 내게 내민다.
6.
그리고 나는 여기 있어,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과 함께, 낮과 밤을 기다리면서, 삶과 죽음을 기다리면서, 너를 기다리면서, 이불로 두 다리를 감고, 문도 잠그지 않고 비행기 소리를 듣는다, 떨어진 꽃잎과 기억을 더듬고, 잠들지 못해 허공에 깜빡이는 신호등들, 그러나 나의 눈동자도, 어둠 속에선 죽어버리고, 이 어둠은 점점 깊어만 간다, 연필에 익숙해진 나날들, 비는 몇 달이고 내릴 것 만 같았어, 손가락 같은 빗줄기들 낮은 지붕을 때리고, 하는 것 없이 쓸쓸하기만 손가락들, 여기에 떨어져 있을 뿐이고, 여기에 떨어져 있을 뿐이라고, 나 또한, 여기 이렇게 이름 하나 없이, 막 지상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네가 내게 주었던 이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세계는 어떤 거냐고, 거기도 비가 내리냐고 물었지, 향수와 담배연기 섞이고, 바다는 육지를 그리워하며 파도치고, 조금씩 파도에 허물어지는 해안, 거기에 떠도는 빛들, 우주의 수없는 빛들처럼, 저 많은 것들 도시를 떠돌고, 커튼을 내려쳐도,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게, 아무것도 볼 수 없게, 이 고독한 형이상학을 유지하려, 수없이 커튼을 내려도 무엇 하나 가릴 수 없고, 너는 내 귀를 물고, 내 그곳에 손가락을 넣어본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도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파도 옆에 누워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얇은 모래알들이 옷과 살결 사이로 스며들고, 손톱, 내 모든 틈으로 파고든다, 내 모든 빈자리로, 너는 들어와 앉고, 서늘한 밤 내 그곳을 파고들었지, 네 무게 강하게 나를 누르면, 내 모든 곳에 파인 짙은 자국들, 팔에는 멍이 들고, 유두는 곤두서서 너를 경계한다.
고래 같은 너의 침묵을 나는 알아, 그리고 고래처럼, 바다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처럼, 너는 내게 왔어, 다만 그렇게, 다만 낯선 모습으로, 비와 어둠에 칠해진 얼굴을 하고 짜디짠 바닷바람 네 등을 때리고, 모래와 소금을 내 허벅지에 남기고, 내 안에 짙은 상처를 남기면, 다시 내 얼굴은 화장으로, 어둠으로 덮여 있었고, 농락당한 여인을 흉내 내보았지, 네게 물었지, 좋았냐고, 네 등 위로 떨어진 비 한 방울, 물었지, 세계는 어떤 곳이냐고, 그곳에도 비가 내리냐고.
너는 나에게 사정했다, 너는 나의 배꼽에 사정했다, 너는 나의 가슴에 사정했다 - 너는 내 모든 것에, 내 머리카락에 사정했다. 느린 정액이 지친 허벅지 위로, 지친 사막 위로 흘러내린다, 나는 오래전에 언어를 잃어버린 동물처럼, 그래 네 등 너머 천장에 깜빡이는 불빛들과 그림자들 속에서, 한 줌의 표시를, 한 줌의 의미를, 단어 하나, 내가 움켜쥐고 매달릴 수 있는 단어 하나만을 찾고 있었어, 너는 영혼일까, 너는 육체일까, 이 미친 듯한 비속에서도, 세계는 정말 존재할까? 커튼을 내리면 어둠뿐이고, 이 세계가 없다면, 또 이 불빛도 저 그림자도 없이, 세상을 떠받칠 대지조차 보이지 않고, 허공에서 허공으로 빗방울은 떨어진다, 소리 없이, 끝내 마지막 등불조차 타버리고, 너와 나만이 이 우주로 이어진 어둠 속에서 몸을 맞대고 있으면, 그래도 우리는 존재할까? 세계는 한낱 빛과 그림자뿐이고, 어두운 해변 바다도 볼 수 없이 걸어갈 때면, 나는 얼마나 깃발처럼 느껴졌는지, 온 세월 동안 펄럭이다 해져버릴 것만 같았는지.
너의 눈먼 그것, 내 털들은 빗속에 튀어 오르는 빗방울처럼 동요한다, 그리고 내 배 위로 올라와, 너 나를 부르고, 내 팔을 잡았지, 움켜쥔다, 다시 나를 부르고, 네가 나를 부르는 방식이 아닌, 내 이름이 아닌, 남자가 여자를 부르는 방식으로, 흙 묻은 신발을 신고, 나는 다만 여자일 뿐이고, 너는 성난 듯 이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넌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이곳에 있다고 너는 주장한다, 넌 이곳에 나를 있게 한다, 넌 나를 이곳에 존재하게 한다. 나를 부른다, 떨어져 내게 묻는다, 너는 무엇이냐고, 뺨을 때리고 내게 묻는다, 너는 무엇이냐고, 내게서 떨어지면 영원히 추락해버릴 것처럼, 허공의 빗방울처럼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처럼, 나를 움켜쥐고, 너는 무엇이냐고, 너는 어디 있냐고. 나는 내가 아는 유일한 언어로, 소리 없는 언어로 말하려 한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메마른 고독일 뿐이야, 그리고 나는 너의 유일한 목격자일 따름이다, 대답하려 한다, 넌 다만 이 부피이고, 난 네게 짓눌린 한 육체일 뿐이다.
수없이 너는 문을 닫았다, 수없이 너는 나를 떠났다. 수없는 빗방울 네 등 위에 떨어져선 내 안까지 스며들었지, 나는 다만 목격자일 뿐이다, 나는 구원도 꿈도 아니야, 나는 다만 네 밑에 누워있는 한 여자일 뿐이다, 한 나신, 그리고 죽음 같은 무거움이 네 등을 누르면, 나는 너를 안겠지만, 또 널 내 위로 무너져 내리게 하겠지만, 너는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질문일 뿐이야, 대답할 수 없는 질문, 곱슬머리를 한 질문, 눈 감은 질문, 너라는 질문 하나 내 배위로 추락해 나를 때린다, 차가운 빗방울처럼, 나는 창에 찔린 마냥 쩔뚝거리고, 온 힘을 다해 네 얼굴을 쥐고 말하려 한다, 빗방울처럼, 우린 환영이 아니야, 우린 그림자도 불빛도 아니야, 우린 빗방울이 아니야, 우린 여기 있어, 그리고 나는 늑대야, 죽어서 굳어버린, 어미를 잃고 무리를 잃어버린, 회색 털이 어지럽게 흐트러진, 내 종의 마지막 생존자일 뿐이야, 그래서 네 짠 정액이 입안에 흘러들면, 나는 그걸 뱉어버리고 복숭아를 입안에 놓고 그게 달콤해지기를 기다릴 거야.
7.
바람 속을 떠돌았어, 골목에서 골목으로, 서울에서 서울로, 도시의 주홍빛 혈맥을 따라, 그랬어, 텅 빈 이름 하나 걸치고, 가슴 한편엔 바람만 움켜쥐고선, 그것을 쥐어 잡아 작은 공으로 만들어 내 안에 삼킨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편지처럼, 낙엽처럼 허공을 딛고 올라, 도시엔 수없는 빗줄기들, 고개 쑥인 빌딩들 하염없이 저들의 발치만 내려 보았지, 대기는 바위처럼 단단하다가도, 금세 깨져 흩어져 버리곤 했지, 유리조각처럼,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 모래가 될 때까지, 가을은 옷을 벗는다, 드러난 두 어깨를 너는 안았다, 거기에 멈춰있었다, 잠들었다, 기계처럼, 완전히,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차분히, 조용히, 사랑만 하고 죽은 벌레처럼, 너는.
매미 껍질처럼, 네 부피와 무게만 내게 남기고, 이것만 무심히 남아 나를 누른다, 피부만, 머리카락들만 여기에 나와 머물러 있다, 네 두 눈은 어둠 속을 굴러다니다 저 심연으로 떨어져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는 걸까, 이젠 아무도 모를 너의 기억들을, 잠든 척 숨을 내뱉는 걸까, 이렇게, 나를 붙잡는 네 온기 또한, 이렇게 조금씩 멀어져서는, 끝내 사라져 버릴까, 끝내 만져지지 않으면, 없어져버릴까, 가을처럼 바닥에 떨어져 버릴까, 빗소리마저 멈추면, 세상엔 아무 소리 없고, 두 귀만 소용없이 이 침묵 속에서, 두 눈은 어둠 속에서, 너를 찾게 될까, 이 모든 것들 아직 여기에 남아 있는데, 이 모든 것들, 나를 감싼 두 팔도, 나와 맞닿아있는 가슴도, 내 다리에 엉켜있는 다리도, 너의 감촉도, 너의 냄새도, 두 나신을 담은 침실과, 그 위에 쌓여온 세월의 먼지도, 천천히 흔들리는 커튼을 본다, 천천히 침식해 들어오는 도시의 소음들, 우리의 섬에는 세상의 소리가 파도처럼 몰려온다, 모래가 될 때까지, 이 손가락마저 모래처럼 부서져 버릴 때까지.
저 너머엔 도시가 펼쳐져 있어, 저 아래론 수없는 차들이 저 많은 방향으로 흩어진다, 어디로, 파란 정맥을 따라, 저들의 신호 앞에서 대기하고, 가속할 때, 오직 그것만 확실한 것처럼, 한 줌 종이를 쥐고, 이름 없는 삶들은 살아간다, 나처럼, 언제나 소리 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 그럴 때마다, 혀와 두 입술로 조용히 너의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도시는 지상의 상처 같기만 하고, 나는 너의 흉터를 만진다, 이 도로들을 따라, 이 골목들을 따라, 너의 삶은 나에게로까지 이어져 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게 무엇이든, 내 것 중 확실한 것은 육신뿐이야, 저 너머, 유리 속에 반짝이는 것은 모두 도시의 빛들뿐이다, 현상들, 온밤을 헤매고도 떨어지지 못한 불빛들, 때로는 내게 길을 묻고, 때로는 내가 길을 묻는 그곳, 그곳엔 비가 내린다, 불빛들을 적시는 가여운 소리, 너의 눈가에선 희미해지고 너의 눈가에선 고요해지는 소리들, 그리고 여기에, 여기서 내 삶은 이어진다, 소리 없이, 조용히 잠든 밤 도시에서 불어온 빗방울 속에서, 바람은 여기까지 불어 내 창문을 두드리지만, 걸어 들어와, 침대 맡에 서서 우리를 내려 보는 걸까, 미친 듯이 잠들어 있는 네 얼굴에 기억되지 못하는 입맞춤을 남기는 걸까. 나를 때리던 바람이 너에게 까지 이르러, 머리카락을 휘저은 걸까, 잠든 너를 확인하고, 거기에 한 줌 공허를 던져 놓는 걸까?
무엇도 너를 붙잡진 못한다.
제자리에서 제자리로, 나로부터 나에게로 떠돌았다, 나 자신만 끌어안고 내게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라고, 말했다, 수없이 너를 불러도 모두 거짓이고, 수없이 너를 부정했다, 여기만, 이 작은 공간만 나의 차지이고, 현관을 닫으면 마냥 낯설 뿐이라고, 어떤 것도 나를 가질 수 없다고, 어떤 것도 나일 순 없다고, 이것들, 손끝에서 만져지는 모든 것처럼, 손끝에서 소유하는 모든 것처럼, 너 또한 그렇다고.
그런데 넌 문을 열고 들어와 감히 나를 부정했다, 나를 안고선, 두 팔로 나를 쥐고, 너의 것이라고, 내 가장 짙은 어둠 속까지, 내 가장 깊은 고독에까지 걸어 들어와선 네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 어둠도, 이 고독도 너의 것이고, 이것도 네 것이고 저것도 네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너의 세계 속에서 소작농처럼 고개를 숙인다, 가을처럼 옷을 벗는다, 벌거벗은 나무 같기만 하고, 이 모든 옷자락들이 소용없이 느껴졌어, 무엇도 나를 가릴 수 없다고, 다만 네게 내 나신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이게 내 전부라고, 말했다, 마지막 잎사귀까지 털어내면 내 얇은 육체만 남아 나를 지탱했다, 내 육체, 두 다리, 두 팔, 너무 쉽게 휘어져 버릴 것만 같은 이것들, 이게 나야, 그리고 이게 나의 손가락들이고, 이 끝엔 네가 있다, 너 너, 이 단어만이 너를 담을 수 있다, 이 단어만이 너를 표현할 수 있다, 이 단어 속에서만 너는 존재한다, 너, 너는 나를 소유했고 나를 범했다, 잠들었다, 너는.
잠들었다, 조용히 숨을 내뱉고, 들이쉬며 생명을 유지한다, 이 공기가 너의 틈으로 들어가, 네 온 혈관을 맴돌다 나온다, 머리카락은 배를 파고들고, 맥박은 차분히 나를 두드린다, 주장 없이, 의미 없이, 아무 의도 없이, 다만 너의 존재를 유지하며, 다만 존재하며, 다만 거기 그런 모습으로, 말없이 네 온기를 세상에 내주며, 떨어지는 내 머리카락을 붙잡는다.
다만 지도의 한 점 같고, 너 또한 그런 것만 같았다, 네가 내게, 내가 네게 붙였던 수없는 이름들, 사랑이라는 이름도, 잠들고 나면 바람이나 생각들처럼 나를 해지게 하고, 이 회색빛 침묵에, 내가 아는 모든 단어를 쏟아도, 이 어둠에, 내가 아는 모든 색상을 쏟아도, 내 모든 언어로 너를 불러도, 다시 널 끌어안아 내 품에 내 모든 냄새를 네게 주어도 소용없이, 너는 잠들었어, 나는 여기서 새벽을 기다리는데, 이 많은 불빛들을 보고 있는데, 이 많은 기억들을 유리에 비추며, 유리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에 얼굴을 그리며, 소리 없이, 통과하는 모든 것들을 보고 있는데, 지나는 모든 것처럼 난, 이렇게 혼자인데, 이렇게 어쩔 수 없는데, 너는 잠들었다, 완전히, 네 나신만 남겨두고.
8.
거기선 비가 내리지, 잠든 듯 떨어지는 평화, 잠든 네 배꼽에 고이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나라는 여자는, 나의 불안을, 나의 공포를, 나의 불완전함을 원망하다, 몸을 뒤집어 볼 뿐이고, 거기에 떨어지는 것들 중에서, 끝없이, 네 이름을 찾으며, 너의 이마에는, 수없이 내 그림자를 던져 보았지, 네 위로, 그물 같은 나를 던지고, 그림자론 네 눈썹을 건드려 보았어, 네 열 손가락 정성스레 내 발을 씻겨 줄 땐, 내 사이를 오가는 네 손가락들, 하는 것 없이 쓸쓸히, 줄지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소나기처럼, 그래 별들처럼, 잠시만 내 곁에 머물러 달라며, 잠시만 내 손을 쥐어 달라며, 흔들어 너를 깨워도, 저 멀리 잠든 너의 지붕, 너의 창문, 너라는 이름이 소유한 모든 것 위로, 새벽 불빛들 소리 없이 파도치곤 했지, 파도 앞에 서서 소리치곤 했지, 이것들이 나를 무너뜨릴 것만 같고, 이 어둠이 나를 부숴 버릴 것만 같을 때, 이 무의미가 나를 삼켜 버릴 것만 같을 때, 있어 달라고, 내게 너를 달라며, 소리 없이 너를 깨우던 때, 움직이지 못하는 두 육신은, 두 존재, 껴안지 못하는 두 그루 나무처럼, 너는 너라는 공간 속에, 나는 나라는 공간 속에 멈춰 서서 끝없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이다. 네 얇은 가지들, 곱슬진 머리카락들, 내게 이르지 못하듯, 아무리 너를 만지고, 아무리 너를 흔들어 보아도, 이렇게 너를 쥐어도, 온밤을 네 곁에 머물러도, 다만 내 삶의 끄트머리에 서 있을 뿐이고, 나 또한 그렇게, 두 존재 사이에 드리운 이 무한한 공간, 이 괴리를 어쩌진 못한다.
그리고 거기엔 비가 내린다. 창문 너머 멈춰 선 모든 것들, 말없이 고개 숙인 파란 가로등들 파란 연기처럼 창밖에 흔들리는, 가여운 잎들, 막연히 깜빡이는 간판들, 활자들, 길은 길에서 길로 이어지고, 골목에서 골목으로 늘어선 걸음, 걸음 하나 위로, 이 괴리에 다만 남겨진 수없는 창문들을 두드리며, 손들이 하나씩 커튼을 치울 때면, 그 사이로 달려드는 모든 차선들, 신호들, 신호를 기다리고, 때때로 시계를 쳐다본다, 때때로 오랜 기억 속에서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말없는 얼굴 하나, 손톱들, 그 끝으로 가리키던 신발들, 빗방울들, 너와 나의 존재를 잇는 가여운 것들.
그 위로 비가 내린다. 세상은 끝없이 회전할 뿐이고, 다만 내 작은 처마를 두드리고선, 떨어져 각자의 생각에 잠긴, 저 많은 창문들 위에, 물로 된 이름 하나를 남기고, 다시 그걸 지우고, 때때로 삶은 우스울 뿐이고, 그 사이에 누워 있는 내 나신은 어찌나 우스운지, 입안에서 아스러지는 이 시간도, 이 모든 숨결, 이 모든 고통, 이 모든 슬픔도 다만 낭비처럼 느껴졌는지, 손가락 하나로 김 서린 창문에 네 얼굴을 그려보고, 다시 주먹으로 그걸 지워 냈다, 수없이, 그 위에 작은 이름을 쓰고 지우고, 내 삶은, 네가 모르던 내 삶은 다만 그렇게 이어져 왔을 뿐이다, 또 다른 이름을 지우고, 기억 위에 기억을 이어갈 뿐이고, 그리고 그 바닥에서 나라는 사람을 찾아내고, 내 실루엣을, 내 나신을 발견하고 그 안에 나를 담아 본다, 팬티를 집어내, 수도 없이 그랬던 것처럼, 거기에 두 다리를 끼워 놓는다, 그림자 같이 흩어진 내 옷가지들, 무릎은 바닥에 붙인 채, 하나하나 집어 다시 그 안에 나를 담고, 차차 나의 소유를 입고, 기억들 속에서 내 낯선 이름을 찾아내어, 발끝은 바닥을 누르면서, 다만 존재하려는 막연한 충동만으로, 걸아가 욕실 불을 켜고, 거울 속에서, 내 두 눈동자와, 머릿결과 피부를 확인하고, 변기에 오줌을 누고 일어선다. 내 나이와, 내 성별과, 내 직업과, 내 습관들을 입고, 익숙한 것처럼, 걷는 것에 다시 익숙해지려 하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네게서 멀어진다.
거기엔 비가 내리지, 내 걸음걸음 밑으로 떨어져 터지고, 거부당할 때, 우두커니 서 있는 형상들 위로 이름 하나 되지 못한 채 떨어져 흘러내리고, 바퀴 앞에선 흩어지고, 차선 위를 흘러갈 때, 나 또한 대부분 이 빗방울 같이, 단지 물일 뿐인데, 왜 나는 흘러내리지 못하고 서 있는 걸까, 이 무게를, 이 고통을 감내하며 땅을 누르고 있는 걸까, 눈먼 짐승처럼, 질문하지 않고, 고개는 땅을 향한 체, 땅, 이 위에 서 있는 모든 다른 형상처럼, 나는 잔인할 뿐이다, 나는 부서지지 못한다, 나는 흘러내리지 못한다, 나는 잠들지 못한다, 동상처럼, 영원히 비를 맞는 동상처럼. 너는, 네 손가락들 고집스레 하나하나, 하나하나 각자의 소리를 내면서, 너의 슬픔으로 세상을 두드리다, 지쳐 꿈을 꾸다 잠들어, 낮은 곳으로, 가장 낮은 곳까지 흘러들어선, 그곳에 몰래 너를 담아도, 끝내 내 앞에 서서, 이렇게, 가장 단단한 모습으로 내게 묻는다.
네가 한마디로 묻는다면, 나 또한 한마디로 대답하겠지. 너는 묻지 않았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 너는 끝내 침묵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어울린다는 듯이, 너는 점점 단단해지고, 멀어져, 결국엔 작은 돌처럼 시야의 끝에서 깜빡이다, 사라지고 나서야, 네가 듣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고서야 너는 부재 위에, 너의 침묵 위에, 이 괴리 위에 너의 이름을 부른다, 말한다, 이 목소리만이 나를 지탱한다, 이 목소리만으로 나는 존재한다, 너를 부르는 이 목소리만이, 존재한다, 이 빗속에, 너의 이름을 구성하는 음성, 이 부재 속에 홀로 울리는 목소리만이.
이 빗방울에 네 이름을 붙이고, 천천히 내 머리를 적시는 따스한 평화, 조금씩 나를 허무는 이 움직임들, 이 약한 움직임들, 너는 이마에 떨어져, 천천히 콧등을 타고 떨어져, 내 윗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이내 내 아랫입술을 타고 흘러, 내 모든 걸 스치고 흘러내린다. 이게 나다.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확인시킨다.
너는 떨어진다, 드러난 내 모든 것, 내 옷가지 속으로 스며들어 나를 적시고, 내가 숨겨왔던 비밀들 속으로, 스스로 해왔던 모든 변명들, 그곳에만 남겨둔 너의 이름들, 너의 흔적들을 찾아 파고든다. 그러나 거기에 내 대답은 없다. 내 대답은 다만 여기, 내 입술 위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너는 비고, 창문을 망가뜨리는 비이고 부서진 유리조각이다.
입술을 움직여 발언한다. 소리를 지른다. 너, 너, 오직 이 단어만으로 너를 부른다. 너는 떨어진다, 너는 모든 빗방울들이다. 너는 떨어진다, 내 모든 존재 위로, 나, 이 미완의 존재 위로. 이 미완의 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