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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건방과 소신 사이에서

시건방을 택했다.

by 혜운

오늘은 아주 바빴다. 바쁜 와중에 나를 한층 더 이해하는 날이 되었다. 남의 간섭과 참견을 마뜩찮아 했지만 이렇게 싫어하는 줄 정확히 알아차리게 하는 사건을 겪었던 것이다. 이 나이가 돼서야 이런 나의 성격을 알게 됐다는 데 내 스스로도 놀랐다. 가만 보니 윗사람이 우유부단하거나 조직 장악력이 없다고 느껴질 때, 잘 모르고 일을 시킨다는 생각이 들 때 나의 이런 마음은 불거져 나온다.

오늘 이런 내 성질에 불을 지르는 일이 발생했다. 오너가 바뀌는 바람에 가뜩이나 바쁜 우리 부서였다. 바뀐 오너를 맞느라 여러 일들이 겹치고 지침이 왔다 갔다 해서 같은 일을 두세 번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내 상사는 새 오너와의 대면과, 그 분을 모시고 진행할 회의를 준비한다고 갖은 지시사항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와 부하들은 두서없는 지시사항들을 정리하고 이행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중이었다.

장시간의 오전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상사가 짜증스럽게 내게 던진 말은 아직 우선 순위에도 들지 못한 어떤 지시사항의 진행 상황이었다. 회의 전, 그가 무작위로 쏟아 놓았던 말이나, 그 이전부터 수시로 내뱉은 질문은 까맣게 잊은 듯한 말투였다. 시간적 여건이나 업무의 난이도를 고려할 때 당연히 안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도 인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당황했다. 그가 뱉어 낸 말들을 정리하고 다시 내 입으로 뱉어 낼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지침이 더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아 보고서의 목록을 쓰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에 갑자기 화를 내는 내 상사. 나도 화가 나서 같이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그간 쌓여 왔던 감정의 분출이기는 하지만 상사가 화를 내는 상황은 내게도 당혹스러운 경우였다. 그 오더를 받을 때 나는 상사와 이미 목록을 먼저 보고하기로 약속을 해 놓은 상태였고, 목록 이야기는 그 약속을 환기시키는 차원에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화를 내며 자기 사무실로 가 버렸고 나도 황당해서 한참을 멍하니 있던 중 자기 방에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다. 들어갔더니 자기가 이 바닥에서 얼마나 일을 오래 했는데 이런 식으로 행동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나도 이 바닥에서 충분히 오래 했고 알 건 다 안다고 대꾸했다. 그 상사의 실력을 평소부터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나도 이 말을 하고 놀라긴 했다. 놀란 김에 덧붙여서 말했다. 당신의 태도에서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상사께서 지시하신 사항만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 노력하겠다, 더 이상의 건의나 의견 제시는 하지 않겠다고 쏘아붙이고 그 방을 나와버렸다.

승진 심사가 코앞에 있어서 이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나도 언젠가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이라 후련하기도 했다. 그래서 안 했으면 더 후회했겠지라고 나를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나도 이런 생각은 했다. 위아래로 두루 원만한 성격이어야 더 클 수 있는데, 내가 이런 걸로 화를 내니 저렇게 실력이 없는 상사 밑에서 일하는 신세가 되었겠지라고. 결국 아랫사람이 손해 보는 것이 조직 생활인데...

언젠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경솔한 행동을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시 말을 한다면 내 한계를 넘은 것이고, 말을 안 한다면 아직 수준이 안 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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