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외웠던 글이 문득 생각났다. 능률과 실질을 숭상한다는 말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걸 아는 사람은 아마도 내 나이 또래 아니면 그 이상일 것이다. 어렸을 때 이 말이 들어간 한 장 짜리 글을 외워야 했던 때가 있었다.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그걸 만든 이유는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외모가 나이만큼 보이지 않아야 환호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참 요상하다. 젊은데 늙어 보이면 부끄러운 것이고, 늙었는데 젊어 보이면 자랑스러운 것이다. 늙고 싶어서 늙은 게 아니고, 젊고 싶어서 젊은 게 아닌데, 늙어 보이는 것이나 젊어 보이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나 보다. 하긴, 젊은 사람들이 필러 시술을 받고, 피부를 하얗게 하는 조치?를 받는 걸 보면 젊음은 선택이란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예쁘다는 말,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 사람이 없겠지. 사실 말은 그렇지만 실제로는 예쁘지도, 젊지도 않을 수 있다. 예쁘고 젊다는 일반적인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일 게다.
외모만 그런 건 아니다. 하다 못해 브런치도 그렇다. 내 브런치를 몇 명이 조회했는지 알 수 있다. '좋아요' 시스템과 조회수 확인 시스템이 아마 외모로 치면 예쁘고 젊은 기준을 말해 주는 것일 게다. 심지어 브런치는 연재작가가 되기 위한 구독자 수도 정해 놨다. 아무나 예뻐질 수 없다. 브런치에서는.
왜들 그럴까 생각해 봤다. 누구나 사람은 유기공포증이 있다고 한다. 늙으면 유기되니까, 못생기면 유기되니까, 잘나지 못하면 버림받으니까 그런가 싶다. 인정받는다는 것, 칭송받는다는 것은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아마도 그래서 다양한 기만술이 발달한 게 아닐까? 콘텐츠는 별 볼일 없는데 제목이 유난스러워서 꺼내어 보는 책이 있고, 제목이 흥미로워서 시청하는 영화가 있듯이 말이다. 사실 요즘은 대놓고 멍 때리기 좋은 콘텐츠가 넘치긴 한다.
새 물건이지만 낡아 보이는 게 있다. 낡았지만 제 기능을 다하는 물건도 많다. 사람도 그렇다. 진짜 늙은 것은 마음이 늙은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도전하지 않으면 늙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새것, 헌것을 구분하기보다 용도에 맞는 역할을 하는가를 따지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사람도 그렇고 말이다. 도대체 얼마나 젊어 보여야 만족할까?
새삼 어렸을 때 교육이 중요함을 느낀다.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라는 말이 이렇게 절실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