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이든 아름답다
우리는 종종 묻는다. "왜", "무슨 이유로" 사는가라고.
삶 앞에서 그 질문은 무의미하다.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살아간다는 건, 마치 바람이 오직 하나의 방향으로만 불어야 한다는 고집과 같다. 그런데 삶이란, 그리 간단치 않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어느 날엔 절박한 숨 한 줄기일 수 있고, 또 다른 날엔 문득 피어난 한 송이 꽃일 수도 있다. 영원을 약속한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 곁을 떠난다. 남산 타워에 수없이 매달린 자물쇠들은 사랑을 지키려는 마음이라기보다 그 사랑이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식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이유로 살지만 결국 그 이유조차 시간 속에서 스러져 가는 것을 목격한다.
그렇기에, 한 가지 이유에 자신을 가두지 않아도 된다. 이번 생에는 이 이유로, 다음 생에는 저 이유로 살아간다면 삶이 더 다채롭지 않을까. 다음 생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기왕 사는 거, 한 무대 위에서 다양한 배역으로 출연하는 삶이 더 근사하지 않겠는가. 다양한 배역을 맡으면서 우리는 나 자신조차 몰랐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떤 역할은 나와 잘 맞지만 어떤 역할은 영 안 맞는다는 것만 알아도 충분하지 않은가. 모든 배역을 다 잘할 수는 없다. 때론 준비되지 않은 배역이 맡겨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준비했다 한들 내가 연기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여부는 관객이 판단할 일이다. 그리고 관객이 판단했다 한들 뭐가 바뀔까? 내가 그런 역할을 해 봤다는 사실 자체만 남는다.
우리는 정체성 없이 흔들리는 자신을 불안해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규정되지 않은 존재는 실체 없는 공허가 아니라 아직 피지 않은 가능성이다. 어느 하나에만 쓸모가 있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들판에 서 있는 말뚝은 경계 표식일 수도 있고, 캠핑족이 텐트를 고정하는 기둥일 수도 있다. 그네가 되어 어린이들의 로망을 만족시킨다면 그 추억은 대대로 이어질 것이다. 이유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 아니라, 삶을 가장 인간답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