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차려, 그 쓸모없고도 의미 있는 것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좌우로 정렬! 어깨동무! 앉았다 일어나기 30회!” 혹은 “엎드려!, 팔굽혀펴기 30회!” 이른바 얼차려, 기합이다. 요즘은 ‘군기훈련’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속뜻은 다들 안다. 나 혹은 누군가가 무언가 잘못했거나, 부대 분위기가 느슨해져서 군기 잡기가 필요할 때 등장하는 전통의식이다. 문제는, 이 얼차려가 필요하냐 불필요하냐, 혹은 폭력이냐 정당한 훈육이냐를 두고 끝없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용사들은 얼차려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운동은 체력단련장에서 자발적으로 하면 되는 것이지 왜 강제로 하느냐”라고 묻는다. 맞는 말이다. 체력 향상이라는 목적만 보자면, 얼차려는 너무 즉흥적이고, 비효율적이다. 자세도 제대로 안 나오고, 횟수도 들쭉날쭉하다. 억지로 해야 하니 체력이 다져지기보다 오히려 부상을 유발할 수도 있다.
사망 훈련병에 '완전군장 달리기' 지시…군기훈련 규정 위반 정황(종합) | 연합뉴스
이 이야기는 군 외부에서 군을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군에서 얼차려는 체력을 키우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질서를 회복하는 의식’에 가깝다. 집단 내에서 잘못된 행동에 대해 일정한 반성과 주의를 요구하는 일종의 알림이다. 법적 제재나 징계보다 가볍고, 말보다 확실한 ‘신체의 언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얼차려가 군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한다. 이 대답이 곤란한 질문에 반문해 보자.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 말밖에 없다면, 군대는 어떻게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얼차려가 채워야 하는 공간이 이것이다.
예전엔 “너, 오늘 얼차려감이다.”라는 말만으로도 긴장감이 돌았다. 지금은 “지휘관에게 불만이 있으면 소통을 요청해라”는 분위기다. 이것도 좋은 방향이다. 다만, ‘불만이 있어도 버티는 힘’, ‘상황을 감수하는 끈기’는 기르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얼차려는 가혹행위가 아니어야 한다. 얼차려는 이런 이유로 신체적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하며, 모욕적이지 않아야 하고, 비인격적이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예 없어져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흔히 하는 말로 군대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군은 설명과 설득이 항상 최선인 집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신속히 수용하고 반응할 수 있는 반사적 질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반사신경은 훈련만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가끔은 얼차려가 그 빈 공간을 채운다.
이쯤 되면 묻게 된다. "왜 얼차려를 줘야 할까?"보다 중요한 질문은 "왜 얼차려가 나오는 상황까지 가야 했을까?"가 아닐까? 군기는 행동보다 태도에서 나온다. 태도는 말보다 분위기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어떤 순간, 조용히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하는 장병 한 명으로 인해 형성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얼차려는 쓸모없어 보여도 의미는 있는 것이다.
훈육과 통제 사이, 훈련과 자율 사이에 존재하는 군대만의 회색지대를 채우는 수단이 얼차려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