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교사는 박봉인 월급 때문에 중도 포기해야 했고, 의사는 성적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슷한 간호사는 어떨까? 하며 들어온 병원이라는 곳에서 나는 점점 나를 잃어 갔다.
규칙과 규율 그리고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무분별한 인격모독들의 최전상 지대였다.
내가 처음 간호사로 근무를 하던 때는 2000년대 초반이라 지금과는 병원 환경이 많이 달랐다.
어쩌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기 전으로 과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기로 쓰는 차팅을 해야 했고, 한 번만 틀려도 수정테이프로 환자 차트를 수정하면 안 되었기에 새로운 종이를 가져와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했다. 똑같은 글자를 쓰고 또 쓰고 계속 반복하는 단순 노동의 끝판왕이었다.
그런 생활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자차트가 등장하고 영상촬영들도 필름으로 현상하는 것이 아닌 컴퓨터로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간호사를 시작한 지 약 5년도 안 되었을 때는 필름을 끼워서 사용하는 기계를 사용했는데 이름도 까먹을 정도로 요즘은 잘 쓰지 않는 곳이 많다. 빛이 엄청 밝아서 눈이 부실 정도로 형광등이 빼곡히 들어간 보드에 필름을 끼워서 보는 시대였다. 허리 MRI 만 해도 수십 장, 거기에 X-RAY 같이 여러 장의 검사가 들어가면 그 차트는 엄청 묵직하다.
그런 시절들을 겪어 오며 나름대로 일을 즐기고 있었지만 불과 몇 년도 안 되어서 나는 병원에서 3번이나 넘게 퇴사를 하게 되었다.
이유는 지금으로선 잘 기억나진 않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우선 첫 번째 병원에선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만
편애가 병적으로 심한 수간호사의 애정하는 신규샘과의 비교질과 인격모독으로 갑질하는 병원 문화였다.
대학병원 3사의 스타일을 배우라며 다른 간호사들이 돌아가며 알려주는 통에 머릿속은 엉킨 머리카락 같았다.
매일이 이 리치이고 저리 치이는 걸리적거리는 물건 같았다. 사람 같지 않았고 아무 쓸모없는 바보 멍청이에 왜 사는지 이유를 모르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 아니 사람 취급도 안 하던 극심한 이기주의자들이었다.
자신들이 하는 것처럼 따라와 주질 않는다며 내가 이해 못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마다 다 각각의 차이가 있을 뿐
따라가는 속도가 다를 수 있음에도 이해는커녕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었고
유독 나만 싫어하는 사람과 근무를 같이 붙여놓고 매일을 시달리게 만들었다.
식당도 혼자가게 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 재미난 게 있으면 지들끼리만 웃고 내가 같이 껴들면 넌 몰라도 된다는 이상한 논리로 점점 나를 멀리했다.
일이라도 쉬웠으면 좋으련만 처음부터 특수파트에 들어가서 안 그래도 힘든 간호사일을 몇 배나 힘들게 겪어야만 했다.
매일을 환자가 없는 수술방에서 남몰래 흘리던 눈물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다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다.
그렇게 어렵게 배우던 신규간호사 시절을 눈물로 지새우다가 결국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참다 참다 내가 못 견뎠던 이유는 부모님을 건드려서 그렇다.
내가 실수를 했는데, 이젠 하다 하다 할 소리가 없는지
"야 너네 부모가 이렇게 가르쳤니?"
" 너 낳고 미역국 먹은 네 엄마가 불쌍하다"
" 어디서 저런 게 들어와 가지고 진짜 사람 성가시게 하네"
등등 지금도 듣기 싫은 모진 말들과 폭언들이 내 귓가에서 맴도는 것 같다.
두 번째는 성형외과의원에 들어간 곳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는데 그곳은 매일매일 환자들로 넘쳐났고 나처럼 느리고 일의 우선순위를 모르는 사람에겐 멘붕이 올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지금도 너무나 이해가 안 가지만 환자들에게 상냥해야 함에도 나도 사람인지라 언제나 스마일을 고수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이때도 나의 상사라는 사람은 의료진도 아니었고 홍보팀 담당자가 의료진인척하고 우리를 총괄했다. 근무표를 짜고 가끔 일 손이 모자라면 우리가 하는 일을 자신도 직접 했다.
그 여자는 아이를 출산하고 육아휴직 중이었다가 기간이 종료되고 나오자마자 내가 근무하는 부서로 발령을 받아 오게 되었다. 인상이 좋고 말투도 따듯해서 좋은 사람이라 착각했다. 그렇게 뒤에서 호박씨를 깔 줄은 정녕 몰랐다.
내 앞에서는 나를 칭찬하더니 내가 없을 땐 그렇게 나를 씹어 대고 내 흠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간호사인 나 보다 조무사들을 더 위해주고 그들을 더 챙겼다.
물론 자기가 더 이뻐하는 사람이 생겼을 수 있다. 그렇다고 대 놓고 차별에 보란 듯이 나를 괴롭히기까지 했다. 내가 컴퓨터를 사용하면 오래 쓴다고 뭐라 뭐라 핀잔이 늘어지는데 그때 유행하던 싸리월드와 디카 때문에 사진 정리한다면 한나절을 보내도 다른 사람들과 떠들거나 오히려 그들과 놀기 바빴다.
그럼에도 나는 억울하게도 매일 1,2분씩 늦어서 지각쟁이로 더 신임을 잃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땐 내가 ADHD라고 의심 조차 하지 못했을 때라 억울하기도 하다)
결정적인 사건은 환자에게 컴플레인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치욕을 경험했다. 같은 일을 하는 직원을 챙기는 것이 아닌 곧 죽어도 "고객이 왕이다!!"라는 시전을 하며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었다. 고객에게 사과를 하라는 것이다. 뭔가 잘 못도 없이 단지 고객이 나의 표정이 맘에 들지 않고 자신의 기분이 상했다고 말이다. (오히려 그 고객의 표정이 더 아니꼬웠다. 왜냐면 쌍꺼풀 수술로 눈은 부었고 멍이 들었기 때문에 약간 박명수의 우씌 하는 표정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거다)
그때 난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이 말이 아니었고, 부정출혈로 (월경이 아닌 날에 생리처럼 출혈이 나오는 상태) 갑자기 그런 상태라 놀랬었다. 큰 병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일에 집중이 안되었다.
환자가 가고 나는 말했다. 지금 내 몸 상태가 이러니 힘들다고 그랬더니 그 여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핑계 대지 말고 지각이나 하지 마!
그리고 너랑 일하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너는 모르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 과연 네가 여기를 다니는 게 맞는지"
가뜩이나 몸도 안 좋아서 울고 싶은데 그 여자는 나를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귀찮은 사람 대하듯 그렇게 몰아갔다. 결국 또 다른 일이 터지면서 나는 같이 근무하던 부서 직원 모두에게 왕따를 당했다. 그 여자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퍼부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그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 봐도 심장이 쪼그라들듯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밤마다 숨이 안 쉬어지고 누가 나를 누르는 듯 가위가 계속 찾아왔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살이 많이 빠졌다.
그때 가정의학과에서 어떤 스트레스를 그렇게 받길래 몸이 그러냐며 신경 안정제를 처방해줬었다. 지금 봤을 때 공황을 겪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뒤로 일을 그만둔 후 나는 사람들 눈을 못 쳐다봤고, 길을 물어야 할 땐 그들이 나를 길도 모르는 바보 천치로 알까 봐 묻지도 못하고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며 찾아야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못 마땅하게 보던 엄마는 애가 왜 이리 바보가 되었냐며 또 다그친다. 그렇게 나는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상담실장을 하고 싶었던 나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솔직히 내가 겪어 온 일들을 모두 나열하면 정말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하다. 그만큼 끔찍하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만큼 참혹하다.
근데, 지금도 나는 병원이라는 군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젠 그때의 경험들이 단단하게 굳어져서 그런지 나를 싫어하던 이들의 눈초리가 무섭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상태라고나 할까?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재밌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간호사 중에서 상담 분야를 전문적으로 하는 상담 간호사이다. 지금은 상담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상담 분야로 뛰어들게 되었을까?
그건 다른 것보다 나를 잘 이해하는 것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닌 내가 좋아하고 재미있어하고 즐기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책을 통하거나 영화나 경험을 통해 찾아보는 것이다. 그럼 자신에게 가장 맞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상담 분야로 간호사만 한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영업직도 해봤고, 직접 학원을 운영하기도 하고, 보험, 부동산, 방문판매업 등등 여러 가지 다양한 직군들을 경험하면서 나만의 노하우가 쌓여 간 것 같다.
혹시나 나처럼 집단 이기주의가 득실거리는 병원 군대에 속한 분들이 계시다면 힘껏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