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만 잘하면 되는 시대는 끝났다

시니어 디자이너가 갖춰야 할 새로운 무기

by 호두

연간 평가, 무거운 현실과 마주하다


연간 종합 평가 발표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누군가에겐 새 학기의 시작을, 또 누군가에겐 연봉 인상을 기대하는 설레는 순간일 수도 있지만 지난해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내게는 그저 무거운 마음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것인지.. 평가서에 적힌 부정적 피드백이 유독 마음을 짓눌렀다. 단순히 부정적인 피드백 때문이 아니라, 해당 피드백을 몇년째 비슷하게 받고 있다는 점이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이 회사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8년 5개월. 세상도, 회사도 변했는데 왜 나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을까?




작업자로서의 인정, 그러나 그다음은?


그동안 작업자로서 인정받아온 덕분에 힘들어도 즐겁에 일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 취해 다음 단계를 보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시니어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회사에서 제안한 파트장 역할을 맡게 되어 일곱 명의 파트원이 생겼다.


한창 성장 중인 신사업 부서의 디자이너였기에 업무량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루 종일 미팅하고, 파트원들의 작업을 피드백하고, 파트의 업무를 조율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끝났다. 내 개인 업무는 자연스럽게 야근으로 이어졌다. 쏟아지는 업무를 처리하기 바빴기에 구성원들의 성장을 케어할 시간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 시간이 지속되자 파트원들에게 좋은 리더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사람 관리에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라,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잘 챙겼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한 치 앞만 보면서 일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니어 디자이너에겐 디자인 외의 역량 더욱 필요해지는데, 나는 기술적 성장 이외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구성원들은 리더의 그릇 크기만큼 성장한다고 하던데, 이대로는 내가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럴 수는 없지!" 늘 이렇게 다짐하고 더 나아지길 소망했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할지 몰라서 흐지부지 되기 일쑤였다.




시니어 디자이너의 새로운 무기


회사에서는 "성장"을 독려하지만, 실상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생존"이다. 이제는 벼랑 끝에 선 기분으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단계가 왔다. 내가 가진 기술적 역량은 곧 AI가 따라잡을 것(어쩌면 이미 따라잡혔을지도 모른다)이기에, 직업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쟁력을 갖추고 구체적인 증명을 해야 한다.

우선 시니어 디자이너의 성장 방향을 분류해보니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기술적 성장 – 최신 디자인 툴과 방법론을 익히고 더 정교한 작업물을 만드는 것

리더십 성장 – 조직 내에서 팀원을 성장시키고 팀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

커리어 확장 – 디자인 외의 역량(기획, 비즈니스, 데이터 분석 등)을 키워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것

어쩌면 리더십 성장과 커리어 확장은 한 몸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분명한 건 지금까지 나는 기술적 성장에 집중해 왔고, 현재 회사에서 원하는 나의 성장은 리더십 성장이다. 이제는 "스킬"보다는 "관점"과 "판단력"이 더 중요하고, 내가 직접 만드는 것보다 "잘 만들게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이야기다.




작은 변화가 만드는 새로운 길


팀장님은 내게 '로우데이터'가 좋다고 말씀하셨다.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진 생각과 감각들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문제는 그것을 가공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제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글을 시작으로, 올해는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리더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팀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찾고, 성장을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우선은 AI가 디자인 업무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좀 더 깊이 탐구해 보려고 한다. 단순히 툴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AI를 디자인 워크플로우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지 실험해볼 생각이다. AI를 활용한 자동화가 어디까지 가능할지, 인간 디자이너의 개입이 필요한 영역은 어디인지 직접 경험하면서 답을 찾아가려고 한다.

변화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일상 속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다는데 이런 작은 변화들이 쌓여서 언젠가는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선명해지길 기대해 본다. 올해는 기대한만큼 성장하는 한해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