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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Dec 04. 2019

낯선 공간, 익숙한 맛

이삿날 흔한 메뉴 '짜장면' 이야기

이사하는 날. 이 날은 왠지 짜장면을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기운이 다 빠져 공복감이 극에 달한다. 이삿짐센터에서 다 해줄 것 같았던 이사는 사실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이벤트였다. 그리고, 방 셋 중간 평수의 아파트에서 작은 오피스텔로의 이사라 쉬울 거라 착각했다. 오히려 큰 공간에 산재했던 물건들이 작은 곳으로 들어오며, 한껏 세를 과시하듯 공간을 먹어치운 것도 모자라 급기야 주인을 밀어낼 기세다. 버린다고 버렸는데 여전히 버리지 못한 건 잘 버리지 못하는 습관뿐이었다.


성인이 되어 한 이사는 대체로 간편했다. 외국에서 주로 월세 살이 하며 이 집 저 집 전전하던 시절엔, 집주인에게 보증금 받고 주고 대형 밴을 빌린 값만 치르면 그만이었다. 몇 번 엘리베이터로 스스로 옮기면 될 정도로 짐이 많지 않았고, 계약 절차조차 간단해 따질 것도 신경 쓸 것도 별로 없었다. 이번 이사 과정은 여러 가지로 미숙했고 덕분에 여러 가지로 고생스러웠다. 결과적으로 이번 이사는 시간, 노동력, 신경에 비용까지 쓴 것과 쓸 것이 너무 많았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배달해준 짐을 방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나와 우연히 찾은 중식당에 앉아 짜장면을 기다리다 그때가 아련히 떠올랐다.




어린 시절 이사는 잦은 이벤트였다. 둘째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도 했고, 막내가 태어난 후에도 두어 번 있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 동네에서 옆 동네로 삶의 터전을 옮기던 이사들에서 마지막 한 번을 제외하곤 그 일은 오롯이 우리 가족의 일이었다. 이삿날이면 아버지는 업체로부터 용달 화물차를 빌려오셨고 어머니는 그릇, 옷, 침구류를 동네 슈퍼에서 얻어온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짐을 꾸렸다. 막내가 태어나며 식구가 늘었고, 우리 키와 몸무게가 느는 만큼 짐도 많아져 처음엔 1톤 화물, 다음엔 2.5톤, 그다음엔 대형 '탑차'가 이삿날 집 앞에 섰다. 이삿날이면 늘 아버지 지인 한 두 분, 혹은 부모님 사촌형제 한 두 분이 오셔서 박스에 포장한 짐들과 가구들을 싣고, 내리고, 정리하는 일들을 도와주셨다. 이삿짐센터라는 서비스들이 생겨 노련한 전문가들이 포장부터 이동, 정리까지 도와주는 요즘에도 이사는 보통 일이 아닌데, 그 일들을 부모님이 모두 손수 했었다니 참 수고로운 일이었겠다 싶다.


그 시절엔 경제 성장률과 인구 증가율이 높았고, 지역 재개발이나 아이엠에프(IMF)처럼 큰 경제적 사건들이 많아 양극단의 다양한 이유로 이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요즈음이라고 이사가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주거 트렌드가 변화한 탓일까? 주위에도 1인 가구 이사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어떤 형태의 이사든, 그 날 일찍부터 시작해 옛 집을 떠나온 이삿짐은 새 공간 곳곳에 서너 시간 만에 자리 잡고 오후 두세 시에는 어느 정도 마무리된다. 대충 정리를 마치고, 점심이라기엔 늦은 시간에 허기를 느껴 자연스레 휴대폰을 꺼낸다. 여러 전단지를 보고 비교해가며 시키던 그때와 달리, 요즘엔 배달 앱(app)을 열면 짜장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다양하고 화려한 음식이 넘쳐난다. 그래도 오늘은 왠지 짜장면을 먹어야 할 것 같다. 한 그릇만은 배달이 안되지만 나스스로는 그 곳으로 배달이 가능하다. 앞으로 자주 걷게 될 낯선 거리를 좀 익혀둘 겸 문 밖으로 나서 본다.




이 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발견한 중식당 <매화>. 용산역 구 '용사의 집' 뒷골목에 위치한, 간판에서부터 오랜 세월이 보이는 이 중국집에는 늦은 시간임에도 혼밥 하는 분들이 눈에 띈다. 짜장면 1식은 혼자 먹어도 어색하지 않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가게 내부를 둘러보니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먹어보지 않아도, 옆 테이블의 모락모락 김 나는 갓 볶은 간짜장의 향으로 결코 그 맛에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 묘한 기대감도 생긴다. 간짜장 하나를 주문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익숙한 한 그릇이 내 앞에 도착한다. 이삿날, 신문지를 깔고 앉은 바닥에서 먹던 그 짜장면은 아니지만 낯선 동네, 낯선 공간에서 느끼는 익숙한 맛에 마음이 편해지는 건, 꼭 이런 날 이 한 그릇을 먹었던 또 다른 이유가 아니었을지. 낯섦을 감싸는 편안한 맛. 이삿날엔 이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보통의 편안함이 화려한 미식보다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이삿날 = 짜장면 


이라는 오랜 공식이 우리 혹은 이전 세대부터 관념처럼 여겨지고 있다. 요즈음도 그럴까? 몇몇 젊은이들에게 물어본 결과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한다. 이삿날 요리를 하는 것은 번거롭고 지치는 일이므로 끼니로 음식을 배달시키는 것은 가장 편리한 선택이지만, 플랫폼과 기술의 발달로 배달앱을 이용해 아무 음식이든 먹고 싶은 것을 시켜먹을 수 있어 짜장면만으로 한정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 혹은 그 이전 세대는 왜 하필 짜장면이었을까? 아마도 짜장면의 편의와 보편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동네를 가든 배달하는 중국집이 있었고, 짜장면이라는 음식이 실패 확률이 낮은 보편적 국민음식 아닌가. 그리고 그 동네의 어느 집 이삿날, 첫 배달은 중국집 입장에서 앞으로의 단골을 만들 놓칠 수 없는 홍보의 기회일 것이므로, 배달 기사들이 들러 너도나도 메뉴가 적힌 홍보 전단을 놓고 가니 동네 사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전화 한 통으로 집에서 편하게 끼니를 해결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선택이 있었을까?


어쨌든 지금, 내 앞에 오늘 위로의 한 그릇이 있다. 면을 소스에 비벼 한 젓가락 입에 넣자, 고소하고 짭조름하게 입안에 퍼지는 간짜장소스의 풍미에 의외로 다시 싱가포르에서 월세방 전전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어느 이삿날 낯선 방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하던 일은, 노트북 전원을 켜고 좋아하던 드라마 어느 장면을 틀어두는 것이었다. 방안에 울리던 익숙한 배우의 목소리에 낯선 공간에서의 불편함이 편안함으로 바뀌던 마법처럼, 이삿날 짜장면 한 그릇이 오늘의 고단했던 마음을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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