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드 바이블 2-3, ‘물’ 이야기
목이 말라 편의점에 들어갑니다. 자연스럽게 냉장고 앞으로 가 생수 한 병을 집어듭니다. 요즘은 라벨이 없는 제품도 많아졌습니다. 환경을 생각하면 작은 플라스틱 한 장이라도 줄이는 선택이 반갑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뚜껑을 열어 시원한 물을 몇 모금 마십니다. '캬'하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몸 안 곳곳으로 수분이 스며드는 느낌이, 살아 있다는 감각으로 이어집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방금 마신 걸 왜 ‘생수’라고 부를까요? 물에 생명이 있다는 걸까요, 아니면 단지 상징적인 표현일까요?
우리는 마시는 물을 생수라고 부르고 때때로 ‘죽은 물’이라는 표현도 씁니다. 마치 물이 생명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생수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명력을 갖고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물은, 생명에 꼭 필요한 물질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산소를 태우고, 이 과정은 대부분 수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물은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자, 움직임의 기반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이 흐를 때 살아 있다고 느끼고, 고여 썩을 때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생물학이든 신학이든, 물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공유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흐르느냐 마느냐'입니다. 대체로 흐르는 물은 생명에 도움이 되고 고인 물은 그렇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부터 유수불부(流水不腐), 즉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고 사람의 정진을 물에 빗대기도 했습니다. 흐르는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땅에 스며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에제 47,9
에제키엘서 47장은 성전 문지방 아래서 흘러나온 물이 점점 강물이 되고, 결국 죽은 바다를 살리는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이로 인해 바다로 고기들이 돌아오고, 나무들이 자라며, 생명이 넘치는 장면을 그립니다. 그러나 흐르지 못한 늪과 웅덩이는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으로 남습니다. 이 장면에서, 물의 생사 여부는 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흐르는가, 닿는가에 달려 있다는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물이란, 다만 흐르는 물인 것입니다.
최근 며칠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쏟아졌습니다. 남쪽 일부 지역엔 안타까운 홍수 피해도 발생했습니다. 많은 경우, 피해는 비 자체보다도 물길이 물의 양을 감당하지 못할 때 생깁니다. 흐르지 못한 물이 역류하고, 낮은 곳을 덮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물길을 다스리는 일은 고대 중국에서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순임금은 바로 이 치수의 사명을 우(禹)에게 맡기며,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일을 명확히 국가적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이전에 같은 임무를 맡았던 곤(鯀)은 댐과 둑을 쌓아 물을 가두는 방식으로 접근했지만, 반복되는 홍수 피해를 막지 못한 채 실패했습니다.
반면, 우는 물을 억누르기보다 흘러가게 하는 수로 중심의 방식을 채택하였고, 이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치수 전략이었습니다. 우는 전국을 돌며 골짜기를 따라 수로를 개통하며, 지역에 맞춘 지형별 치수를 시행하였습니다. 치수는 성공적이었고, 순임금은 혈연이 아닌 덕(德)을 기준으로 제위를 우에게 양보하였습니다.
몇 해 전 강남이 폭우에 잠긴 일이 떠오릅니다. ‘강남 스타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첨단 도시도 배수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아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인공지능이 미래를 예측한다고 하지만, 자연에 관한 것들은 여전히 인간의 예측을 자주 벗어납니다.
우리 성당에서는 얼마 전 성전 안팎의 배수공사를 했습니다. 깔끔한 성전 외관과 달리 바닥에는 문제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물이 스며드는 바닥을 다시 정비하고, 노후된 배수로를 고쳤습니다. 마치 앞으로의 비를 내다보신 듯, 신부님은 그 일을 서둘러 마쳤습니다.
성경은 물의 양면성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예언자의 입을 통해 '물이 닿아 모든 것이 살아난다'라고 전하면서도, 물을 파멸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창세기 6장에서 묘사되는 노아의 홍수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간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자, 하느님께서는 모든 생물을 심판하기 위해 40일간 비를 내려 온 땅을 물로 덮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인간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응답으로서, 물이 생명을 쓸어버리는 심판의 수단으로 등장한 장면입니다.
탈출기에서는 물이 이집트를 향한 하느님의 열 가지 재앙 가운데 일부로 사용됩니다. 특히 첫 번째 재앙에서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해 모든 생물들이 죽고 물을 마실 수 없게 된 장면은, 생명의 원천이 곧바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자주 ‘이상기후’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이상한 것은 기후가 아니라 사람이 아닐까요. 산을 깎아 옹벽 아래에 집을 지어 늘 불안을 안고 살거나, 지반이나 지형를 거스르고 과도한 난개발로 싱크홀의 피해를 입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연의 탓은 아닐 것입니다. 깨끗한 물을 더럽히고, 물의 길을 막아 위험을 자초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은, 비를 뿌리는 창조주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람의 이기심은 뻔하고, 자연은 여전히 아득한 존재입니다.
"너희에게 깨끗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에제 36,25
이마에 흘러 이전의 나를 씻는 성스러운 물처럼, 하늘에서 내리는 물이 재앙이 아닌 은혜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