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마케팅 나무 ep.11 - 퍼널과 파이프라인
“여러분, 이쪽으로 가시면 지금보다 훨씬 따뜻하고 비옥한 땅이 있습니다.
마음껏 과실을 따먹을 수 있고, 마실 물과 곡식도 충분합니다.
저와 함께 가시겠어요?”
누군가의 말에 이끌려, 대략 3~4백 명쯤 되는 사람들이 함께 길을 떠났다.
긴 여정이었지만, 모두의 눈빛엔 기대가 가득했다.
그러던 중, 무리는 갈림길에 닿았다.
그 맞은편에서 또 다른 이가 손을 흔들었다.
“여러분! 이쪽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고,
소와 양이 뛰놀며, 친절한 마을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 중 절반쯤 되는 200명이 갈림길로 접어들어 그쪽으로 떠났다.
남은 이들은 여전히 처음 만난 이끌이를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걷다, 깊어보이는 강 앞에 도착했다.
이끌이는 말했다.
“걱정 마세요, 준비된 배가 있습니다.
이 배를 타고 함께 건너갑시다.”
그런데 배는 고작해야 20~30명만 탈 수 있는 조각배 한 척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주춤했고, 이내 발길을 돌렸다.
결국, 단 24명만이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강을 건너, 마침내 그 땅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곳은, 상상과는 달랐다.
나무는 시들었고, 우물은 메말라 있었다.
창고 안에는 고작 열 명이 일주일을 먹을 식량만이 남아 있었다.
그 광경을 본 20명은 타고 온 배를 타고
강 건너로 돌아가 버렸다.
그 땅에는 서너 사람만이 남았다.
바람이 지난 자리에서, 이끌이가 중얼거렸다.
"우리의 여정 중, 뭐가 문제였지?"
- 미지의 상상 중
"매니저님, 지금 회사 브랜드는 누가 관리해요?"
잡념 속을 파고든 팀장님의 질문이었다.
"브랜드요?"
"네, 회사 로고며, 메인 폰트, 카피 같은 것들?"
'그게 어디 있었더라'
"아! 예전에 업체에서 브랜드 가이드를 줬었어요. 저희 공용폴더에 있는데, 잠시만요 제가 찾아볼게요."
"여기 홈페이지 로고 해상도가 너무 낮고, 저희 이메일에 오가는 로고 이미지들의 비율이 제각각이고 그렇네요"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팀장님 말대로, 로고가 조금 흐릿하게 보였다.
"홈페이지도 계속 관리를 해줘야 하는데, 아마 오랜 시간 방치된 듯하네요."
내가 이 회사에 오기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 홈페이지. 팀장님은 때때로 무언가를 공책에 적으면서 홈페이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참, 엊그제 요청한 퍼널 관련해서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할까요?"
"네 팀장님."
내용은 정리를 이미 해뒀다. PPT에 깔끔하게 표로 정리했다. 자료를 준비하기 전에 우선, 팀장님이 이야기한 퍼널이 뭔지에 대해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마케팅 퍼널(Funnel)은 고객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인지한 순간부터 관심, 고려, 구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단계별로 시각화한 마케팅 모델이다. 깔때기 모양처럼 위는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며, 각 단계마다 고객이 이탈하거나 전환되는 비율을 분석함으로써 마케팅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그러니까 깔때기는, 우리가 대상으로 삼는 고객들이 단계별로 수가 줄어든다는 걸 표현한 거구나'
얼마 전 회의에서 설명을 들은 우리 주력 제품들 중, 이번에 퍼널에 대해 공부할 대상에 대해 정리하자면 이렇다.
스캠 3.5는 1.5 전작에 비해 센서와 소프트웨어가 개선된 현장안전 모니터링 봇이다. 벽에 설치하는 형태인 1.0, 특수 삼각대를 이용한 2.0 버전의 후속으로, 로봇 본체와 결합한 다면 센서가 현장 위험요소를 감지한다. 최근 안전사고가 많아 차세대 안전 모니터링 장비로 홍보 중에 있는 제품이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하나만으로는 크게 효과를 보기 어려워 현장 규모에 따라 여러 버전을 섞어서 제공하는데, 한 세트 가격이 적게는 8천만 원, 최대 사양은 1억 5천만 원 정도로 비싸다.
우리의 퍼널을 조사하기 전에, 은지 매니저에게 주로 문의해 주는 고객들이 어디서 정보를 접하는지, 상담을 하고 어떤 절차로 구매가 이루어지는지를 물었다.
"직접 물어본 적은 없긴 한데, 저희를 검색하는 분들이 있으세요. 안전 모니터링이라고 검색해도 저희 회사가 상단에 있어서 그걸 타고 들어오시거나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가끔 보도되는 뉴스 기사나 혁신 안전기술로 등록된 국가에서 운영하는 나라장터 제품리스트를 보고 연락이 오기도 한다고 했다. 역시나 꾸준히 나가는 전시회, 포럼이나 세미나, 기술발표회 같은 곳에서 주로 영업하고, 명함을 주고받고, 거기서 봤다고 연락이 오는 기회들이 잦다고.
찾아본 이론과 은지 매니저가 말한 정보를 조합하고, 여러 예시 퍼널 설계들을 참고해서 나만의 그림을 그려봤다.
"생각보다, 정리를 잘했는데요?"
팀장님의 칭찬으로, 이렇게 하는 게 맞았을까 하는 의구심은 잠시 떨쳐낼 수 있었다.
"우리 매니저님이 정리한 내용이 고객의 관점에서 정리한 인지부터 구매까지 이르는 여정이에요. 그 사이사이 단계마다 이탈 고객을 줄여서 퍼널을 좀 더 매끄럽게 다듬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의 주된 목표예요."
'우리 매니저님'이라는 말이, 때 아닌 오후 햇살같이 포근했다.
"퍼널의 단계별로 적절한 마케팅 활동을 정의하고 시기적절하게 실행하는 게 중요하죠. 우리가 얼마 전 이야기 나눴던 ATL, BTL 기억나죠? ATL 광고로 인지도를 높이고, 이후 BTL 활동을 통해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여 구매로 이어지게 만드는 방식이에요."
ATL과 BTL. 노트에 적어둔 페이지를 펼쳐 상기했다. 우리 제품을 널리 알리는 ATL은, 멀리서 전광판처럼 말을 거는 방식. BTL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손 내밀 듯 체험하게 하는 쪽. 그 둘이 머릿속에서, 다시 정리됐다.
팀장님은 화이트보드에 쓱쓱 한쪽은 퍼널, 그리고 다른 한쪽은 파이프라인이라고 적은 도식을 그리더니, 그걸 손으로 짚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퍼널 단계 중 인지 단계를 지나면, 그다음 고객들은 더 높은 확률로 영업의 기회로 이어져요. 우리는 그중 일정 기준을 만족한 고객을 SQL, '즉 영업적으로 검증된 리드'라고 불러요.
아직은 용어가 생소할 수 있지만, 쉽게 말하면 잠재 고객이 점점 더 관심을 보이고, 실제로 구매할 가능성이 높아지면 그때부터는 영업의 파이프라인에 진입했다고 보는 거예요. 이 파이프라인 안에서 그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계약까지 이끄느냐가 중요한 거죠."
SQL, 파이프라인... 새로운 용어들에 점점 의식이 흩어짐을 느꼈다. 이해의 속도를 눈치챘는지, 팀장님은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전시회에 참가해 300명의 방문객이 부스를 다녀갔고, 그중 50명이 명함을 주고 상담을 요청했다면 이들은 퍼널 중 상단에 해당하는 리드가 돼요. 이후 이 중 10명과 실질적인 미팅이 잡히고 견적이 오갔다면, 이 시점부터는 파이프라인에 진입한 영업기회로 다뤄야 해요."
예시를 들으니 이해가 쉬웠다. 팀장님이 물었다.
"파이프라인으로 영업의 기회가 됐다면, 마케팅은 이후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음... 영업의 기회가 됐다면?'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업의 기회가 됐다고 해도 마케팅도 역할이 있어요. 다음에 영업이랑 회의가 잡혀있는데, 그 회의를 마치고 설명해 드릴게요."
"네."
팀장님은 내 머릿속에 뭉쳐져 있고 막연했던 마케팅 일부분을 주욱 펼쳤다. 처음 마케팅이란 단어를 접하고 막막했던 내가 며칠 사이에 팀장님 말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다니 스스로도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것이 있었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되려나?'
"그런데 팀장님. 왜 죄다 영어 단어예요? 그래서인지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잠깐 눈을 크게 뜬 팀장님.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두 번째 다닌 회사에서 한 동기가 회사에는 너무 영어가 많다며, 다들 있어 보이려고 그러나 보다 하더라고요."
신나는 표정으로 '그땐 그랬지'하는 팀장님.
"팀장님은 그게 어렵지 않으셨어요?"
"저는 첫 직장생활이 해외였어요. 영어가 당연해서 몰랐는데, 한국에 와보니 회사에서 영단어를 많이 쓰더라고요. 어떤 건 불필요하게 쓰는 것 같기도 하고요."
팀장님은 흥미로운 얘기를 이어갔다.
"아마 마케팅에 관한 용어가 제일 영어가 많을 거예요. 마케팅을 대체할 우리말도 없고요. 언젠가 장난 삼아 회의시간에 영어 쓰면 벌칙 게임을 해본 적이 있는데, 마케팅은 실패했어요. 예를 들어, '컨버전 루트의 퍼널 플로우'를 굳이 우리말로 하면... '전환 경로의 깔때기 흐름'? 뭔가 좀 이상하죠?"
"하긴, 영업은 세일즈라고 하든 영업이라고 하든, 다 뜻이 통하는데 마케팅은..."
"영업과 다르게, 그 일을 처음 이론으로 정리한 쪽이 영어권이라서 용어들도 자연스럽게 영어로 굳어진 거라고 해요. 유명한 마케팅 이론가들이 이름을 다 그렇게 지었으니, 국제 표준어가 된 거죠."
하긴, 태권도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태권도는 태권도고, 서울은 서울이다. 사람들이 모르던 별에 자기 이름을 붙인걸 뭐라 하는게 이상하지. 마케팅이 마케팅이고, 퍼널이 퍼널인 것은 그 이론을 만든 사람이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는,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