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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하던 방식대로

미지의 마케팅 나무 ep.12 - 상품개발실

by 케니스트리

“어, 우리 딸. 집에 안 오니?”


언제나처럼 밝은 엄마 목소리.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기분이 좋으신 걸까.


“미안해, 엄마. 이번 주말에 들를까?”


아버지는 내가 대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어느 날 갑작스레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는데, 골든타임을 놓쳐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셨다. 오랫동안 고지혈증을 앓아오신 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착하고 순한 사람일수록 울분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다가 건강이 나빠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와 갑자기 이별한 어머니는 한동안 외출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성북구 집을 정리하고 외가가 있는 의정부 근처로 이사하셨다. 언니는 이미 졸업해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지금도 언니는 엄마와 함께 산다. 직장이 을지로 근처라 오가는 버스 편이 많고, 조금만 부지런하면 다닐 만하다고 했다. 언니는 가끔 식당으로 출근하는 엄마 차를 함께 타고 혜화동까지 가서 전철로 출근하기도 한다.


나는 졸업 후 첫 직장을 구하며 독립했다. 핑계는 논현동까지 출퇴근 시간이 너무 길다는 거였지만, 사실 사회에 나가면 곧바로 자취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꿈이 현실이 되어 기뻤던 순간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엄마 집이 그리운 날이 점점 잦아졌다. 이렇게 크고, 이렇게 화려하고,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마음 둘 곳이 없다고 느껴질 때면, 어김없이 집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날엔 꼭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너랑 상의할 것도 있으니까, 일요일 점심에 가게로 와. 언니도 나오기로 했어.”




늘 하던 방식대로


“이번 전시회는 규모가 꽤 크다고 들었습니다.”


B2B 영업팀의 설태훈 팀장과 오승우 매니저가 회의에 참석했다. 대표님 지시로 마케팅팀도 이번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어, 함께 회의를 하게 된 것이다.


“뭐, 그렇다는데 우리 쪽은 개인 소비자 대상 제품이 아니라서요. 그렇게 크게 하진 않지”


최팀장의 질문에 설팀장은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호한 어투로 답했다. 대화 중간중간 최팀장은 묵묵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그렇군요. 일정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현재 준비 상황은 어떤가요?”


설 팀장이 의자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끼며 답했다.


“부스는 작고, 업체에서 대부분 준비해 줘요. 우리는 시제품이랑 설명자료만 실어 가면 되죠. 그렇지?”


"네."


설 팀장이 오 매니저를 바라보며 말하자, 최팀장은 또다시 무언가를 적었다. 나도 괜히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대화 중 나온 단어들을 무작위로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대행사가 있군요. 혹시 부스 시안이 있나요?”


“시안? 시안 받은 게 있나?”


오 매니저를 바라보며 설팀장이 물었다.


"요청하면 줄 거예요. 항상 하던 대로라서,... 달라고 해 볼까요?"


“아, 가기 전에 미리 한번 보려고 하는 거라서요.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부스 설치는 전날이나 전전날이겠죠?”


“아마 일요일에 설치할 거예요. 업체에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회의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최팀장은 설 팀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남아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영업팀 사람들을 두고 회의실을 나섰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자리로 돌아오던 중 팀장님이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엔 관찰을 한 번 해보죠. 아, 그리고 다다음 주 일요일에 무슨 일 있나요?”


“아뇨, 팀장님. 특별한 일은 없어요.”


“주말 근무 대체휴일로 신청해 줄게요. 전시회 부스 설치 같이 보러 갈래요?”


“네 팀장님.”


자리로 돌아간 팀장님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무언가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현실이죠.”


입꼬리에 살짝 웃음기가 보였다.


"이번 전시회는 우리가 데뷔할 무대는 아닌 것 같네요.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확인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R&D 고선수


“헤이, 미쥐쒸.”


처음엔 하도 발음을 꼬아서 재미교포 4세쯤 되는 줄 알았다. 가짜 아메리칸 악센트로 인사하는 그는 사실 부산 토박이, R&D 수석 연구원 고선수다. 별명이 아니다. 선수는 그의 본명이다. 팀에선 그를 ’고 프로‘라 부른다. 디지털 장비 이름에서 따온 별명처럼.


고수석은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다. 사투리 억양이 짙지만 스스로는 ‘현대 서울말’이라고 우기고, 말재주가 좋아 주변 사람들이 그와 대화할 때 즐거워한다.


“이거 좀 봐요. 이번에 프로젝트 과제로 제출해 볼까 하는데, 아이디어 어때요?”


예전 팀에 있을 때부터 나는 그와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학예회 발표하듯 신난 얼굴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소개하곤 했다.


그가 보여준 화면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시뮬레이션한 입체 영상이 떠 있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걷고 있었다.


“요즘 다들 스마트폰 보고 걷잖아요. 사고도 많고요. 이건 그걸 예방할 신호장치예요.”


“아, 그걸 스마트폰 좀비라고 하죠.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요.”


“맞아요. 다른 나라는 바닥 신호등 설치도 하잖아요. 이건 주변 상황을 분석해서 위험을 알려주는 장치예요.”


“스마트워치인가요?”


“네, 웨어러블이에요. 지금은 팔에 차는 형태인데, 고민 중이에요. 이걸 착용하면 주변 혼잡도, 고개 숙임, 걸음걸이 패턴을 분석해 위험 상황을 인식하고, 스마트폰 화면에 알림을 보내요.”


그런 위험이 사회적 문제라는 건 익히 들었다. 나도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영상이나 음악이 지겨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심지어 커다란 헤드폰으로 주변과 나를 차단한 사람들도 많다.


“근데 이미 파인워치나 은하워치 같은 제품도 있는데, 이런 목적으로 새로 살까 싶긴 해요.”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혹시 기분이 상했을까 걱정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다행히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음… 맞는 말이죠. 그래서 제조사랑 콜라보하거나, 시니어케어 헬스워치 형태로도 고민하고 있어요. 기술 구현은 쉬워요. 문제는 데이터를 모으는 거죠. 한동안 좀비처럼 좀 걸어 다녀야 하겠지만.”


그의 좀비스러운 표정과 행동은 바보 같았지만, 언뜻 진지한 제품개발 수석 연구원으로도 보였다.


‘정말 제품화된다면, 이걸 어떻게 마케팅하지?’


관심을 가질 사람이라면 학부모나 기관, 지자체가 떠올랐다. 단순한 센서 알림만으론 부족하니, 운동 루트 추적이나 걸음 수 카운트 기능을 넣어 젊은 층까지도 겨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정말로 개발하게 된다면, 기능이나 콘셉트에 대해 제안드려도 될까요?”


“오케이사르!”


... 사르? 물론이죠 란 의미일까. 그는 또 그만의 이상한 말투로 답했다.




누군가는 늘 하던 방식대로 변화 없이 일한다. 누군가는 늘 하던 방식대로, 관찰하고 생각한다. 또 누군가는, 늘 하던 그만의 방식 대로 꿈꾸고 상상한다. 이렇게 제각각의 방식이 한데 모여 회사를 이룬다.


나아가느냐 가라앉느냐는, 비중의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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