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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호객

미지의 마케팅 나무 ep.14 - 산업 박람회 참관

by 케니스트리

“이번에 주로 전시할 제품 리스트예요. 보시고 궁금한 점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오 대리가 메신저로 보낸 시트 한 장에는 제품 리스트가 정리되어 있었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등 제품 종류가 구분돼 있었고, 제품명 옆에는 버전도 함께 표기돼 있었다. 나는 그것을 참고해 영업팀에서 쓰던 제품 카탈로그를 펼쳐 하나하나 체크해 보았다. 최신 정보로 잘 정리된 카탈로그였지만, 몇몇 버전 정보는 개정이 필요해 보였다.


전시회가 시작되기 전, 팀장님은 내게 브로슈어에 실린 제품 중 전시회에서 주로 설명할 것들을 추려 정리해 보라고 했다. 본인도 부스에 올 관람객을 맞이하기 위해 제품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전시회가 열리기까지는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전시장에서


평일인데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았다. 같은 산업에서 각자가 내세우는 서비스를 들고 나와 소개하는 자리. 기업 간 거래, 즉 B2B의 장은 생각보다 더 화려하고 컸다.


우리 부스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다 종종 멈춰 관심을 보였다.


“이건 어떤 원리로 동작하는 거예요?”


관람객들은 제품의 작동 원리, 배터리 지속 시간, 인증 여부 등을 물어왔다. 대체로는 현장에 함께 나온 오 대리와 설 부장이 응대했고, 때때로 명함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팀장님과 나는 잠시 관전 모드였다.


팀장님은 전시회 부스 곳곳과 우리 제품이 진열된 코너를 하나하나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미지 씨, 보니까 어때요?”


설 부장이 한두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뒤 내게 물었다.


“생각보다 관람객이 많은데요? 이 전시회, 규모가 큰 편인가 봐요?”


“하반기엔 꽤 큰 행사야. 올해 마지막 전시회이기도 하고. 안전산업 전시회는 해외에서도 많이들 와.”


“아, 저희도 수출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실제로 바이어들이 관심 많이 가지나요?”


“그럼. 와서 물어보시는 분들 많아요. 인도나 말레이시아 쪽은 언어가 잘 안 통할 때도 있지만, 그쪽 바이어들이 특히 한국 기술에 관심이 많더라고. 문제는 이게 배터리로 작동하는 장비라서, 현지 전파 인증이나 AS 같은 민감한 이슈들이 해결돼야 수출이 가능하거든.”


“설명서나 사용자 인터페이스도 영문화돼야 하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팀장님이 덧붙였다.


실제로 우리 제품 중 하나인 안전 모니터링 감시봇은 PC와 스마트폰을 통해 관리자가 현장 상황을 실시간 모니터링할 수 있는데, 한글과 영문이 섞여 있어 수출용으로는 영문 버전을 별도로 개발해야 한다고 들었다. 현재는 소프트웨어 개발팀에서도 우선순위가 낮아 해외 업체의 문의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맞아요. 글로벌 사업부 자체가 없다 보니, 한두 분이 해외 BD를 맡고 계시긴 한데 지지부진하죠.”


오승훈 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팀장님은 오후엔 함께 전시장 다른 부스들도 둘러보자며 앞장서셨다.


“업계 전반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예요. 특히 글로벌 대기업들 부스들을 잘 살펴보세요.”


“네, 팀장님. 사진도 좀 찍어둘게요.”


“좋아요. 나중에 다 같이 정리해서 리포트로 남겨야 하니까.”


“리포트요?”


갑자기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마케팅 업무 중 ‘리서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네. 현장 분위기나 눈에 띄는 기술, 부스 디자인, 프로모션 같은 것들 잘 정리해 봐요. 나중에 유용하거든요. 정답은 없으니까 편하게요.”


“네, 팀장님.”


나는 전시장을 지그재그로, 각 회사들이 마련한 부스 사이를 다니며 사진도 찍고, 관찰도 하고, 메모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방식이 얼마나 다양한지 깨닫게 되었다.


‘커다란 배너 간판, 눈에 띄는 제품 진열, 사은품 제공을 유도하는 설문 이벤트까지….’


그중 인상 깊었던 곳은, 브로슈어를 담으라며 관람객에게 친환경 손가방을 나눠주던 부스였다. 원하면 손세정 기능이 있는 물티슈까지 가방에 넣어 주었다.


가방을 어깨에 맨 사람은 자연스레 그 회사의 브랜드 앰배서더, 즉 살아 움직이는 홍보대사가 되었다.


어딘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어딘가는 그저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는 반갑게 맞이하고, 누군가는 무심히 외면한다. 그렇게 호스트와 게스트는 각자의 관심과 매력에 따라 서로를 만나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지난 일요일 가게에서 엄마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엄마의 고민


“한 오륙 년 됐나?”


운을 뗀 엄마의 시선은 마치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식당 차린 지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 참 빠르네.”


언니가 맞받았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이니, 대충 그 정도는 된 듯싶었다.


“요즘은 식당을 계속하는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엄마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언니 쪽을 슬쩍 바라봤다. 언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덤덤한 표정이었다.


“요샌 좀 힘에 부치네.”


“왜, 엄마? 힘들어서 그래?”


식당 일을 늘 즐거워하시고, 그게 삶의 활력이라던 엄마라서 힘들다는 이야기가 낯설게 들렸다. 무슨 큰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걸까?


식당이 있던 번화한 골목은 높아지는 임대료로 인해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한때는 직장인과 학생들로 북적이던 거리였지만, 결국 상인들이 떠나고 남은 건 ‘임대’라고 쓰인 현수막뿐.


잠시의 수익만을 노렸던 건물주들은 지금 다시 활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골목의 온도는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엄마는 욕심 없는 좋은 건물주를 만나 아직까지는 임대료 부담이 크지 않았다.


“지난번에 갔을 땐 손님 많던데. 엄마 바쁘다고 나보고 와서 도와달라고도 했잖아.”


“식사 시간 한두 시간 잠깐이지. 평일 저녁엔 한두 테이블도 겨우야. 근처에 새로 생긴 식당들 때문인지, 아니면 경기 탓인지… 매상은 계속 줄고 있어. 맛이 변했나?”


‘엄마 음식이 변할 리가 없지.’


오랜 세월 장사하며 남은 건 결국 엄마의 레시피라는 걸, 언니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 매상이 줄까?’


엄마는 몇 년 동안 단 한 번 가격을 올리셨고, 그때도 단골손님들한테 일일이 죄송하다고 설명할 정도로 가게에도, 손님들에게도 정성이었다. 그렇게 애착 있는 가게의 문을 엄마 스스로 원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닫는 건 슬픈 느낌이 들었다.


“엄마, 원인을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사실 동네 경기가 안 좋다고 해도, 여전히 잘되는 집들은 장사를 잘하고 있잖아? 다시 잘 될 방법이 있을지 한번 고민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애초에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지 당장 가게 문을 닫으려는 의지로 이 대화를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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