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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레고

카페 드 바이블 2-5, '감사' 이야기

by 케니스트리

"Prego."


어김없이 들려오는, 이탈리아 여행길에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쁘레고'였습니다. 감사함을 표하면 쁘레고, 감사하다고 하기도 전에 쁘레고, 좁은 통로에서 살짝 비켜선 이를 지나칠 때면, 배려한 그도 눈을 마주치며 '쁘레고' 합니다. 이탈리아어에서 가장 범용의 단어로, 매너를 갖춘 이의 척도가 바로 이 단어의 이해와 사용이라고 합니다.

쁘레고는, 점점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게 된다고 믿었던 요즘 낯선 도시에서 발견한 여전한 온기였습니다.


Prego는 이탈리아어로, '천만에요'부터 '부탁드려요'사이 그 어딘가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로는 감사함에 감사할 때 쓰죠.


*사진은 이탈리아 꼬모 지역의 성당 <Chiesa di Sant'Ambregio> 입니다.




"글을 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요, 수녀님."


여전히 신앙에 관한 글을 쓰냐는 수녀님 질문에 한 답입니다. 사실입니다. 처음 새 신자가 되고, 아무것도 모를 때⎯막 천주교를 접하고 모든 게 신선해 조잘조잘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경계 없이 늘어놓을 때와 달리, 신자로써 한 해를 보낸 지금은 천주교를 알수록 모르겠어서 말하기 조심스러워진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겸손해지고 입은 무거워져야 한다고 하잖아요. 실상은 반대라, 글만은 그리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용기를 내어 오랜만에, 노트북을 열고 화면과 머리를 한번 깨워 보았습니다.

그 사이에 있었던, 한 가지 작지만 놀라운 발견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허겁지겁 달려간 성당. 이른 아침 여섯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습니다. 이미 지향 기도로 미사가 시작된 듯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님 상에 인사하고, 2층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큰 나무문을 조심스럽게 열었습니다. 안에는, 아직 해도 뜨기 전에 모인 부지런한 이들의 기도 소리가 들렸습니다. 학교라면, 또 회사라면 5분 늦어도 지각이겠지만, 성당에서는 이르든 늦든 동참에 아무런 눈치가 보이지 않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마태 20,16)는,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조금 늦어도 괜찮은 건, 이 공간에서는 하고자 했고, 또 실천한 이들의 경건한 마음이 1등으로 존중받기 때문입니다. 가장 마지막에 갔어도, 간절히 할 기도는 수두룩했습니다.


사실 이 이른 시간에 성당에 미사를 다니기 시작한 계기는 따로 있습니다. 소중한 이가 위독해 간절한 마음으로 성당에 들렀던 때였습니다. 미사 내내 간절함이 커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이의 치유와 회복을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 싸움에서 당당히 이기고 우뚝 서게 하소서. 따스한 피가 다시 돌고, 그의 따뜻한 보금자리로 무사히 돌아와 안기게 하소서"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성당에 가고, 기도를 했다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마태 14,31) 물을 건너오라는 말씀에 주저하는 베드로에게 호통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이건 정말 말도 안 되잖아요’라며, 착한 이를 데려가시려는 하느님께 원망하듯 바라고, 또 불안해하는 것이 반복되는 고뇌였습니다.

그날 미사의 복음은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치유했는데,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 인사를 드렸다는 전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라고 하십니다.


이 비유는 감사를 이야기합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그른지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나와 내 주위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간절히 바랄 때는 꼭 은혜를 값겠노라고 맹세하며 매달립니다. 하지만 받은 호의는 곧 잊고, 내가 베푼 배려만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곧 감사의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마음에 조용한 반향이 일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바람이 끝이 없는 존재입니다. 무언가를 손에 넣으면 잠시 기쁨이 머물지만 곧 익숙해지고, 또 다른 것을 향해 마음이 달려갑니다. 이 흐름 덕분에 우리는 발전하지만, 동시에 늘 새로운 결핍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끝없이 바라는 마음 때문에 맺음 없이 급히 지치는 듯합니다. 기도하면서도 불행하다는 그런 마음도 드는 것이 아닐까요?


며칠이 지나 이제는 그이의 호흡도 맥박도 안정적이고 회복 추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미사를 마치고 나서 광장에 초를 밝혔습니다. 성모님을 바라며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잡았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고백하듯 전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소중한 그이가 힘겨운 싸움에서 바람대로 버틸 힘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시도 때도 없고 정신없던 바람이 그 흐름을 잠시 멈춘 것 같았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임이 분명한 좋은 소식을 돌아보며 얻은 것은 결핍이 아니라 희망이었습니다.


어느 아침에는 이제는 목소리도 많이 회복한 그이와 통화를 하며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시련에 대해 그것이 맞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눴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련'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악이 넘쳐 우리를 구원하라고 보내신 당신의 아들이 예수님이라면 왜 굳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고 그걸 극복하게 하시겠냐고 말이죠. 주신 것은 시련이 아니라 세상의 시련에 맞서고 견딜 힘으로 교회를 남기신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시련을 주시는 게 아니라 원래 겪을 시련에 굳건히 맞설 마음을 은혜로 전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맞는 것 같다고 이제는 많이 회복한 그이가 동의합니다.


'이 모든 결과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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