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는 참 부지런히 다녔다. 가고 싶고 보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이 툭 치기만 해도 우수수 나올 만큼 새로운 경험과 영감에 늘 목말라 있었다. 그러나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점차 시들해졌다. 와 가고 싶다! 하다가도 근데 안 가도 대충 어떨지 상상이 되네. 그러니 굳이? 라고 결론 나는 경우가 늘어났다. 오픈런 하던 전시도 다음에 가자를 반복하다가 종료되기 전 겨우 가거나 결국 놓쳐버린 적도 있었고, 비슷한 방식으로 상영관에서 보지 못하는 영화들도 많아졌다. 덥고 습하고 비오는 날씨도 굴하지 않고 즐겼던 페스티벌과는 당연하게 멀어졌고, 강박적으로 지도에 저장해뒀던 맛집과 카페는 물론 심지어는 손가락 몇 번이면 들을 수 있는 새 노래에도 호기심을 잃었다.
나이탓인가? 체력이 줄어서 그런가 의심해보았지만 일주일에 2-3번 2시간씩 풋살을 뛰고, 거의 매달 1박2일로 용인-부산을 다녀올 정도인데 체력 탓은 어불성설이다. 점점 오르고 있는 문화생활 비용을 생각해보아도 한창 쏘다닐 때보다 수입은 더 올랐다. 남은 원인은 하나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늘 보고 먹고 가던 곳은 익숙하다. 실패를 감수해야 할 확률히 현저히 적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 에너지의 근원은 주로 용기와 부지런함이다. 새로운 경험이 내 취향이 아니거나, 예상보다 더 많은 리소스를 요구하거나, 지불한 비용만큼의 효용을 발휘하지 못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 그리고 낯섦을 경험하기 앞서 먼저 처리해야 할 것들을 실행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어느날 찾아온 번아웃이 이들을 앗아갔다. 업무를 하며 좇아야 했던 새로운 트렌드가 신물났고,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곁에서 멀어지는 걸 바라보기만 하면서 무기력에 빠졌다. 일어나서 씻고 출근 준비를 하면 감정의 동요 없이 눈물이 흘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도저히 해야 할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글이 읽히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사람을 봐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먹고 걷고 말하고 듣고 자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는 탓에 그외의 것들에 나눠줄 힘이 없었고, 그래서 일상에 조금의 변화만 생겨도 짜증이 팍 치솟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서 리프레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2주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도피에 불과했다. 변수를 줄여야해! 본능이 외쳤다. 살면서 처음으로 안정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옮겼고 만나는 사람들도 줄였고 외출도 자주 하지 않았다. 퀘스트를 깨듯 주말마다 매번 새로운 경험을 찾아 다녔던 시간을 단촐하게 꾸렸다. 회사 - 운동 - 집의 루트가 메인이었다. 늘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섬이라는 지형적 한계에 굴복했던 10대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사람처럼 뭐든 보고 배워도 허기가 졌던 20대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요함이었다. 이것으로 충분할 수 있구나. 매번 뭔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지 않아도, 새로운 경험을 수집하지 않아도 이렇게 살 수 있는 거구나. 놀라울 정도였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가뿐해졌다. 덜어냄의 미학을 몸소 느꼈다.
그때부터 내 삶의 화두는 '내려놓기'였다. 뭔가를 조금 해보려고 하면 이것도 욕심 아냐? 다시 또 발동하는 거야? 하고 마음 속의 보안관이 경보를 울렸다. 순식간에 발동되었던 치기는 내려놓기 보안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다시 잠잠해졌다. 가끔 보안관의 부재를 틈타 욕심이 불쑥 튀어나와 일을 벌일 때가 있었는데 그 끝이 늘 씁쓸했다. 이러다가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과거를 반추하면서 조용히 읊조렸다. 내려놓자. 내려놓자. 처음엔 어려웠지만 점점 쉬워졌다. 마법의 주문 하나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니. 죽으면 그 뿐인데.'라고 생각하면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욕심은 커녕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마저도 희미해졌다. 출근은 당연했고, 평소 좋아했던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것까지 시시해졌다.
상담 선생님께 말씀 드렸다. 선생님, 저 요즘 마음이 되게 가벼운데 그래서 가짜 같아요.
선생님이 물었다. 왜 가짜 같아요?
다시 답했다. 진짜 마음이 뭔지 알아서요. 그런데 그걸 마주하는 게 너무 무서워요.
왜 무서워요?
너무 슬프니까요. 지금 겨우 막고 있는데, 그게 터져버리면 순식간에 휩쓸려 사라질 것 같아요.
내려놓기는 사실 변명이었다. 그때 나는 아빠를 갑자기 떠나보낸 상실감과 아빠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아빠와의 이별보다 조금 일찍 찾아왔던 번아웃을 방패 삼아, 그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내려놓기를 핑계 삼아 회피하고 있었다. 정말 덜어내고 싶었던 감정은, 털어버리고 싶었던 감정은 상실감과 죄책감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려면 아빠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안됐다. 그걸 마주하는 게 나를 집어삼키려고 돌진하는 해일 앞에 서있는 것처럼 두려웠다. 그래서 나의 거짓 내려놓기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에서 그치지 못하고 삶의 의욕을 내려놓기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죽으면 그뿐인데'라는 주문은 '너는 살 가치가 없어', '넌 재밌게 즐겁게 살면 안돼'하고 내 죄책감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외친 주문과도 같았다.
가짜인 마음, 공허해지는 시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마주봐야 했다. 아빠는 더이상 내 곁에 없다. 우리는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다. 겨우 잠가두었던 댐을 여니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밤마다 눈물을 쏟아내고 악을 쓰고 온몸을 뒤틀다가 가끔은 퍽 내리치며 맨바닥에서 잠들었다가 깨서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일주일에 한 두번, 상담 선생님께 가서 새롭게 알게 된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별 수 없이, 그냥, 그렇게 묵혀둔 감정을 풀어두었다. 때로는 선생님께 이렇게 힘들지, 이렇게 오래갈지 몰랐어요. 푸념하며 웃기도 했다. 이러다 투명인간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가벼워졌던 마음이 아니 생존본능이 그렇게 다시 채도를 되찾아갔다.
어느날은 엄마와 동생에게도 말했다. 아빠가 보고싶다고. 엄마와 아빠를 먼저 떠나보낸 적이 있는 엄마는 당신도 가끔 밤하늘을 보며 돌아가신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생각하다가 울기도 한다고 했다. 동생은 생각해보니 아빠와 자신이 비슷한 점이 많다고 했다. 아마 오래 살았다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았을 텐데 아쉬워했다. 그렇게 떠난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그와의 이별을 애도하면서 우리가 더이상 함께일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는 날보다, 스스로를 미워하는 날보다, 문득 웃고나서 웃은 나를 자책하는 날보다, 그래도 살아보자. 웃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자 다짐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균형을 찾기로 했다. 과거처럼 무엇때문에 분주히 움직였는지 몰랐던 것도 아니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하고 허무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내가 좋아하고, 즐길 수 있고,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은 무서워하지 말고 해보자라는 의욕이 생겼다. 마침 부산 락페스티벌 티켓팅이 열렸다. 호기롭게 혼자 도전하려고 했다가 단톡방에 툭 던지니 친구들이 다 같이 가자! 손 들어주었다. 용기가 활활 타올랐다. 친구들과 같이 가니 티켓팅을 하고, 기차표를 끊고, 가는 길을 알아보고, 현장 컨디션을 찾아보는 일들도 귀찮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페스티벌에 가는 날, 전날밤에 내려와 늦게까지 수다를 떨고 자느라 눈 붙인 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난 친구의 첫째딸을 보고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귀여운 것만은 분명한 옹알이를 들으며 그녀와 노는 동안 친구가 사다준 든든한 단호박빵을 아침으로 먹었다. 우리가 한껏 치장하는 사이에 아기 보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텐데 고된 길 떠나는 친구들의 배라도 든든히 채워주려고 짜장국수를 뚝딱 만들어준 친구의 정성에 감읍하여 출발 직직전까지 먹기만 하다가 한껏 빵빵해진 위를 끌어안고 택시를 탔다.
친구의 집에서 페스티벌 장소는 꽤나 부산의 끝과 끝이었다. 40분 정도 걸리는 긴 거리였는데 유쾌한 기사님을 만났다. 기사님은 본인의 외모와 매력을 스스로 꽤 높이 평가하는 분이셨다. 내 몇살처럼 보이요? 라는 질문에 우리는 적당히 50대 정도로 대답했고, 내가 70대요! 하고 자랑스레 건네는 외침에 하이고 저언혀 그렇게 안보이시는데??? 하고 받아치니, 기사님은 오늘이 날이다 싶었는지 본인의 매력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증명하는 에피소드를 끊임없이 꺼내놓았다. 마치 벌써 락페스티벌에 와있는 것 같은 스웩이었다.
이정도면 우리가 방청비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한 편의 쇼나 다름 없었던 택시기사님과의 만담은 삼락공원에 도착하며 끝이 났다. 우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한 기사님을 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공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돗자리로 가득찬 공연장 가장자리에 겨우 자리를 발견하고 돗자리를 깔고서는 마침 딱 맞춰 시작하는 터치드의 무대로 달려갔다. 아직 날은 밝았고 맥주 한 잔도 마시지 못했지만, 온몸으로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과 아낌없이 환호를 내지르는 사람들, 티셔츠와 두건과 깃발로 자신의 애호를 맘껏 드러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앞에서 가야금과 일렉기타를 섞어놓은 듯한 목소리로 우리를 홀리는 가수를 보며 이 가운데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었다.
그렇게 웃고 뛰고 지르고 박수치고 환호하고 감격하면서 밤늦게까지 보고 싶었던 무대들을 즐겼다. 다리는 퉁퉁 붓고 목은 깔깔했지만 낭만과 여운이 짙게 남았다. 바로 잠들 수 없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딸내미의 100일 잔치 준비로 시댁에 가고 없는 친구 집으로 다시 돌아가 우리는 회를 먹고 술을 마시고 터치드의 노래를 들으면서 해가 뜰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 걱정과 근심없이 자네. 라고 생각하면서.
하나씩하나씩 경험치를 늘려갈 때마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이 조금씩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 서글플 때가 있다. 다 해본 것, 맛본 것, 즐겨본 것들이라 예전만큼 감흥이 크지 않고, 또 그렇기에 그와 조금 다른 걸 보아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서 혹은 예전에 해봤던 건데 하고 넘겨버릴 때가 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 나도 바뀐다. 같은 경험일지라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를 수 있고, 그래서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감정이 다를 수 있다. 언뜻보면 하나의 색처럼 보이지만 명도와 채도만 바꿔도 또 다른 색이 되듯이, 예상한 일들도 보는 관점과 임하는 마음가짐만 바꿔도 더욱 다채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상상하고 먼저 실망하지 말 것. 용기와 부지런함을 갖고 '굳이' 할 필요 없는 것들에 '굳이' 시도해볼 것. 굳이, 락 페스티벌에 다녀온 후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갈피가 잡혔다. 일단은 네버 엔딩 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