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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Oct 17. 2019

강아지란 나에게

마음을 치유해주는 소중한 존재

 강아지라는 존재는 나에게 특별하다. 내가 4살도 채 되기 전 어릴 때에도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나는 유치원이 마치면 강아지랑 놀았다. 조용하고 소심한 어린아이에게 강아지는 늘 살갑고 좋은 친구였고, 저녁 무렵이면 나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서 퇴근해오는 엄마 마중을 나가곤 했다. 내게 우정을 나눠준 최초의 존재는 강아지였다. 부산에서 김해로 이사 가게 되면서 강아지는 엄마 친구네로 가게 되었지만, 마음 아픈 헤어짐을 겪고 나서도 나는 강아지라면 언제나 멈춰 서서 바라보며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외할머니 댁의 누렁이들

 김해 아파트에 살면서는 '쫑이'라는 몰티즈를 한 마리 키웠다. 책상 아래 들어가 있는 하얀 털 뭉치를 처음 만났을 때 그 해맑은 눈동자를 보고 너무 기뻤던 기억이 난다. 쫑이는 우리 아파트의 몰티즈가 낳은 새끼였고, 종종 제 어미와도 만날 수 있었던 새초롬한 아가씨였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매일 야간 자율학습을 하느라 강아지를 신경 쓸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지만, 동생이랑은 너무나도 좋은 친구사이였다. 어린 동생은 쫑이를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주거나 꾸며주는 걸 좋아했다. 부모님은 주말이면 늘어져 자고 있는 나를 깨우라며 내 방으로 쫑이를 보냈고, 나는 내 배 위로 따끈하고 묵직하게 올라오는 쫑이를 떼어내느라 파닥거리기 일쑤였다. 나는 쫑이를 많이 좋아했지만 자주 밖으로 산책시키지는 않았다. 개의 행복에 대해서는 무지하던 시절, 쫑이의 세계는 집 안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내가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고 그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내게 쫑이는 더 작은 부분이 되어버렸다.

쫑이 사진은 옛날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 전부다

 동생도 대학을 서울로 오게 되었고 나와 같이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자매는 나중에서야 쫑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부모님이 비밀로 하고 있던 것을 이모가 실수로 우리에게 말해버렸다) 나는 멍해졌고 동생은 오열했다. 쫑이는 13년을 살고 강아지 별로 떠났다. 나는 어느새 우리가 충격받을까 봐 쫑이의 죽음을 진작 말하지 못했다는 부모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개를 키우는 것은 수없이 많은 정신적, 금전적 책임이 따르는 행동이다. 서울 월세집에 사는 사회 초년생인 내가 감히 욕심낼 행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강아지가 보고 싶은 마음은 동물보호단체 강아지 산책 봉사로 달랬다. 애견 카페도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그런 카페의 강아지들은 제대로 보살핌 받지 못하고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르포를 봐서 안타까운 마음에 더 이상 가지 않는다. 동물보호센터에 머물고 있는 유기견을 센터 주변으로 산책시켜주는 일은 보람 있었다. 사람에게 학대받고 상처 받은 강아지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애정을 갈구한다. 이렇게 바보 같을 정도로 충직한 동물이 또 있을까 싶다.

유기견센터의 착한 강아지들은 늘 애타게 가족을 찾고 있다

 시간 날 때마다 유기견들을 산책시키면서 조금이나마 이 아이들의 행복에 일조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결국은 내가 받는 것이 더 많은 산책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할 말을 다 하기보다 조금씩은 참는 편인 나의 스트레스를, 내 손을 핥아주는 따뜻한 혀와 품을 파고 들어오는 보드라운 털이 위로해 주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맑은 두 눈 속에 쫑이가 보였고, 나는 유기견 센터의 아이들과 뛰고 걸으며 잠시나마 그 따뜻한 유대감에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그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안아주어도 이 아이의 생명이 다 할 때까지 보살펴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의 강아지 친구와 쫑이를 잃고서 많은 눈물을 쏟았지만 또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다.


 부모님이 시골에 집을 짓고 사시겠다고 했다. 서울에서 혼자 산 지 10년이 넘어가면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일하면서 가끔은 인간관계에 상처 받는 일들이 생겼고, 나는 부모님의 시골집에 잠깐씩 쉬러 가면서 상처를 메우는 에너지를 조금씩 채웠었다. 맑은 공기, 평화로움, 지저귀는 새들,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나비들, 마당의 푸릇한 잔디는 서울과 달랐다. 시골 특유의 여유로움과 부모님 품이 너무 좋았지만, 뭔가 계속 한 가지가 아쉬웠다. 부모님이 계시는, 넓은 마당이 있는 시골집. 그 시골 생활의 그림에는 뭔가 한 가지 큰 구멍이 있었다. 바로 강아지. 우리 자매는 두 분만 계시면 적적할 것 같으니 집 지키는 강아지 한 마리 들이시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넌지시 건넸다. 외국에 노인들이 머무는 요양병원 같은데서는 환자들의 정서 관리를 위해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과 함께 지내도록 한다던데. 예민해서 툭하면 스트레스받는 딸의 정신을 치유하기 위해 강아지 한 마리 들이지 않으시렵니까? 무책임한 말이지만 일단 내뱉었던 이유는, 부모님도 어린 시절 집에서 시골 개를 예뻐하며 키웠었다는 고모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없으니 마당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생활의 완성은 강아지. 그럴싸하지 않은가. 떨어져 살지만 나도 강아지를 위한 금전적, 육체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노라 현실적인 보채기도 몇 차례. 부모님은 생각보다 쉽게 '그래 강아지 한 마리 들여야겠다. 자, 데려왔다!'라고 말씀하셔서 오히려 우리가 놀랐다. '어떤 애가 좋을까요, 골든 레트리버가 똑똑하다던데. 용맹한 허스키는 어때요.' 하면서 온갖 견종과 그 이름을 생각한 우리 자매의 고민이 허탈할 정도로 부모님은 시골의 트레이드 마크, 시골 똥개, 진도 믹스 한 마리를 데려오셨다. 우리 시골집의 마스코트이자 경비견, 사고뭉치, 나의 정서 안정용 치료견이 된 누렇고 복슬복슬한, 우리 집 막내 '뿌꾸'와 함께 사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강아지 뿌꾸가 우리 집에 처음 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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