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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ho Aug 19. 2022

다시보기를 다시보기

매번 새로운 즐거움에 대하여





    유독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피비가 로스로부터 선물 받은 자전거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장면이나 친구들이 움직이는 장난감으로 달리기 경주 내기를 하는 장면,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내고 식사를 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즐겁다. 

    나는 지금 N번째 프렌즈를 정주행 중이다. 매일 아침,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동영상을 틀어둔다. 시즌 1부터 10까지 전부 보고 나면 다시 시즌1, 1회로 돌아간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늘 새롭고 재미있다. 새롭다는 건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나 자신일 것이다.

    어제 아침 나와 오늘 아침 나는 엄연히 다르니까. 

    어제는 치즈 베이글을 먹었고 오늘은 통밀 베이글을 먹었으니까. 

    어제는 외출 계획이 있었고, 오늘은 진득하게 앉아서 글을 써야지 마음을 먹은 다른 ‘나’ 이니까.     


    오래전부터 그랬다. 프렌즈를 보기 전에는 심슨가족을 여러 번 반복해서 봤었고 어렸을 때는 김나경 작가가 그린 만화책 <빨간머리 앤>을 제본이 떨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어린 나는 용돈을 모아 만화책을 샀고, 유료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받은 동영상 파일들을 폴더별로 정리해 외장 하드에 담아두고 하나씩 열어 봤다. 만화책도 애니메이션도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므로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봤던 것들을 계속 다시 봤다. 언제나 재미있었기 때문에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고 즐거웠다.   


    「나 혼자 산다」에서 기안84가 웹툰을 그리며 대하 드라마 태조 왕건을 보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작업에 집중하는 와중에도 모니터 한쪽에서는 드라마가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순간적으로 역사 드라마에 강하게 끌려서 다시 보기를 검색해보다가 그만뒀다. 나를 사로잡은 건 태조 왕건이 아니라 같은 드라마를 보고 또 봤을 사람 자체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 그리고 그중에서 발견한 몇 가지만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이고 그래서인지 그런 사람을 만나면 무척 반갑다. 가끔 그런 내가 이상하면서도 참 좋다.


    다시 보기는 백색소음처럼 묘한 안정감을 준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 문제집을 채점하면서 다시 보기를 다시 본다. 이제는 다시 보기가 다시 듣기에 가까워진 걸지도 모르겠다. 보지 않아도 어떤 장면이 나오고 있을지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오래된 친구처럼 무슨 생각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이 나를 편안하게 해 준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어렵다. 새로운 드라마나 영화를 보려면 작품 속 인물들과 새로이 사귀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하루하루가 바쁘다. 몰두하지 못하고, 하고 싶지도 않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뭐가 재밌어?’ 혹은 ‘그거 새로 시즌 나왔더라. 봤어?’라고 누가 물으면 대답이 궁하다. 아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만, 이렇게 대답할 때 괜히 멋쩍어진다. 나는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말하기가 부끄럽다.

     몇 년 전 친구 M이 드라마 「하얀거탑」을 다시 보고 있다고 했을 때, 엄청나게 웃으며 놀리고 다음에 또 꺼내 놀렸지만 사실 속으로는 역시 내 친구는 귀엽다고 생각했다. 

     다시 보기를 다시 보는 사람은 장면을 오래 즐기는 사람, 다시 보기를 다시 듣는 사람은 생각이 많은 사람임을, 그러니 사실 귀여운 사람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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