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기록
오늘은,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인생에서 변화를 겪는 시기에 우리가 허우적거리는 것은,
인생의 양상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산을 탈 때처럼 전략적인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달성해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서가 아닐까?
지도를 따라가지 말고 나침반을 따라가라
끊임없이 모양이 변하는 모래사막에서는 지도가 아니라 내면의 나침반을 따라가라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어가라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어가라. 더 많이 쉴수록 더 멀리 갈 수 있다.
모래에 갇히면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라
정체상태에 빠지면 자신만만한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 빼내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혼자서, 함께 여행하기
사막을 건너는 것은 고독과 외로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사이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캠프파이어에서 한 걸음 멀어지기
안전하고 따뜻한 캠프파이어에서 나와 깜깜한 사막의 어둠 속으로 나아가라
허상의 국경에서 멈추지 마라
열정을 가로막는 두려움과 불안감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라
1. 지도를 따라가지 말고 나침반을 따라가라
방황을 통해 진정한 방향 감각을 얻을 수 있다. 내면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 수 있다면,
길을 잃었을 때에도 지도가 없는 곳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사막을 건널 때 혹은 변화의 사막을 건널 때, 나침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역할을 한다.
1)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찾아 준다.
2) 우리를 더 깊은 사막으로 이끌어 준다.
3) 우리가 목적지보다 여정 자체에 중점을 둘 수 있게 해 준다.
방황을 통해 진정한 방향 감각을 얻을 수 있다면 사막에서는 방황이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결국에 나침반 바늘을 따라야 할 지만 알게 되면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때로 우리는 방황하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신기루를 쫓기도 한다.
지구 자기장의 편차에 따라 수정을 해주어야 하는 나침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내부의 나침반이 항상 진실된 방향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방황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불확실성의 개운치 않은 느낌을 잘 다룰 수 있다.
사람들이 방황하면서 저지르기 쉬운 실수
1) 목적지에 중점을 두는 것 : 목적의식을 가지고 방황한다는 것은 우리를 이끌어 줄 방향을 추구하고 걸어갈 길을 찾는 것이지 문제를 그 자리에서 해결해 줄 마술과 같은 치료약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2) 변화의 사막 가장자리를 배회하는 것 : 방향을 찾고 있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사막을 피하고 있는 것
3) 무의식적으로 배회하는 것 : 가고 있는 방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행로에서 벗어나 헤매는 것
하루나 일주일쯤 나침반을 따라가 보라.
그리고 인생이라고 하는 거대한 사막 안에 있을지라도 자신이 걷고 있는 사막의 이름을 불러보고, 존재 방법, 살아가는 방법의 방향을 선택하라.
그리고 한동안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내가 점점 나의 사막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라.
궁극적으로 사막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사막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나침반은 여러분이 이러한 여행을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며, 여러분에게 의미가 있는 그런 방향을 꾸준히 제시해 줄 것이다.
현재 진행형이라는 동사 시제가 있다.
우리의 나침반을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인생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여행을 하는 동안 나침반은 우리가 현재, 이 순간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방향 감각만 올바르게 잡혀 있으면 길을 잃었을 때도, 지도가 쓸모없는 그런 곳에서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어가라
산을 오르는 사람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면 표시되지 않은 오아시스에 대해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오아시스를 정상으로 가는 도중에 마주치는 방해물이나 훼방꾼 또는 장애물로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그냥 무시하거나 제거해 버린다.
이제 유목민처럼 생각하고, 방해물이 사실은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오아시스는 아닌지 한번 자문해 보라.
오아시스는 우리가 사막에서 쉴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준다.
사막에서 휴식을 취하면 사막 자체가 더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휴식을 취하는 오아시스 건, 사색을 하는 오아시스 건, 또는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오아시스 건 모든 오아시스는 매 순간에 충실하게 사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깊고, 즐거운 순간은 종종 이 오아시스에서 일어난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경험은 우리를 아주 완전하게 빨아들여서 우리는 먼 앞의 목적이나 목적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된다.
오아시스는 온전히 현재에 사는 연습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사막에서도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사는 연습을 하게 된다.
3. 모래에 갇히면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라
자기 안에서조차 정체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해보거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뭔가를 시도해 보고 싶지만
두려움이나 실리적인 생각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거나 화가 난다.
내가 애초에 세웠던 계획은 듯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전에는 잘 먹혔던 전략이 이제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뿐이었다.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여행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운송 수단을 찾기 전에 우선 옛날 방식부터 버려야 한다.
밀어붙이기를 멈추고 더 이상 머리를 벽에 부딪치지 않는다면 그 정체된 장소에서 서성거려야 한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대안에 선뜻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냥 그 정체된 상태에서 한동안 머문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 같은 첫 번째 아이디어를 좇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불편한 상황은 아주 새로운 곳이며 중간적인 공간이다.
상황이 꼬인 원인에 대해서 찬찬히 파악하면서, 아직 헤어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그 공간에서 한동안 멈춰서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자기의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의 고집 때문에 일행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겸허해지지 않으면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다.
문제는 스스로 자아에서 공기를 빼내기 전에는 겸허해지는 것의 장점을 보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 한다는 것이다.
겸허해진다 함은 그저 자기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작은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점까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겸허함이며 이를 통해 더 높이 일어설 수 있다.
우리가 사막에서 겪는 변화는 종종 우리 자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겸허함
목적 있는 방황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만 빼면 꼬인 인간관계의 사막에서 헤어 나와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치유의 오아시스로 들어설 수도 있다.
인생을 살면서 공기를 빼야 할 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공기를 빼면 막힌 상황에서 벗어나, 다시 사막을 건너는 여정에 오를 수 있다.
4. 혼자서, 함께 여행하기
다른 사람이 옆에서 도와준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혼자다.
내가 해야 할 결정을 대신 내려 주지 못한다.
진정 혼자가 되고 나면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난다.
내부에 잠자고 있던 나침반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혼의 사막에서 종종 사람들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기도 한다.
[결혼 안식일]이라는 소설에서 작가 셰릴 자비스는 몇십 년 동안 아이들과 남편을 돌보는 일에 정성을 쏟았던 중년 여성들이 즐거움을 쫓아가면서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혼자가 되어야 할 순간에는 산을 타는 산악인이 되기보다는 사막의 은둔자가 되는 것이 낫다.
진짜 사하라 사막에서건 인생의 사막에서건 혼자가 되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이 원하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으며, 우리 속에 들어 있던 심오한 지혜의 울림을 분명히 들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비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목적도 없이, 일정도 없이 그냥 혼자가 되는 것이 그 방법이다.
그러나 혼자가 된다고 해서 외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고독한 상태에서는 자신보다 큰 다른 무언가와 연결되므로.
인생의 사막을 건너는 것은 고독과 외로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 사이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다.
혼자가 되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 계속 움직여 우리의 사막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좀 더 분명한 방향을 찾고자 할 때에는 이렇게 자문해 보면 된다.
"내가 다시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또는 "어떻게 하면 내가 따라야 할 나침반 바늘을 찾을 수 있을까?"
5. 캠프파이어에서 한 걸음 멀어지기
우리 인생에는 따뜻하고 친숙한 캠프파이어들이 있다. 바로 가족, 친구, 집, 그리고 직장이다.
가치관, 일상, 인간관계, 그리고 의식처럼,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쁜 습관과 좋은 습관, 옮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판단도 캠프파이어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 바로 캠프파이어다.
누구에게나 캠프파이어가 있다.
인생이 변화를 겪고 자신이 사막에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캠프파이어를 더 크게 지피기 위해 나뭇가지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우리의 캠프파이어가 비추어 주는 것은 진짜 세상의 극치 일부분에 불과하다.
때로 우리는 안락함과 안전을 뒤로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사막의 깜깜한 어둠 속에서 밖에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원하는 것이 별빛처럼 밤에만 보이는 것과 같다.
유목민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스승형
만능 선수형
전문적인 유목민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따라서 : 정신적인 성장을 향한 끝없는 여행
저자 스콧 펙은 심리 치료사가 하는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환자들에게 내가 그들을 내면의 우주로 안내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가 그들의 우주에 가본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우주를 탐험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원칙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목민은 우리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낄 때 또는 캠프에서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할 때 나타난다.
스스로 유목민
몸을 숙이는 것은 사막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이다.
몸을 숙여서 효과를 보고 나면 캠프파이어에서 멀어지기가 쉬워진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피함으로써 나는 연사로 전업한 첫해 많은 발전을 이루고, 연사로서의 직업 세계에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친숙한 것으로부터 멀어져 용감하게 모험을 하려고 할 때는 다른 사람의 충고나 비판 도는 평가를 피해야 한다.
때때로 스스로의 자아비판이나 판단도 피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 엄격해지기 쉽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스스로의 비판 한 마디가 다른 사람이 작성한 평가서보다 더 해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사막을 여행하는 데 필수적인 '바람 빼는' 작업을 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겸허해져야 할 때가 되면, 상실한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면, 자아에서 공기를 빼야 한다.
그렇게 해야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때로 우리는 자기의 캠프파이어 주변에서 몸을 숙인다.
불꽃이 날아다니면서 보호 안경을 쓰고 그 친숙한 쪽으로 더 몸을 숙인다.
이는 건강이 나빠졌을 때 나타나는 징후를 무시하고, 사랑이 식어 버렸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런 식의 몸 사리기는 '거부'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캠프파이어로부터 멀어져야 할 때 오히려 계속 더 가까이 가게 된다.
중요한 것은 몸을 숙여야 하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자문을 해본다.
이 쇼크를 피하면 사막으로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면 여행을 중단하게 될까?
캠프파이어에서 한 걸음 떨어지는 것은 사막을 여행하는 데에 꼭 필요한 중요한 규칙이다. 캠프파이어에서 물러나면 변화의 사막을 건널 수 있다.
더 중요한 점은 그렇게 함으로써 허상의 국경에 도착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와 신뢰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6. 허상의 국경에서 멈추지 마라
사막은 끝이 없지만, 종종 진정한 휴식을 안겨주는 경계선이 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 일 년 만에 처음으로 웃었을 때, 새 직업에 적응하고 비로소 휴가를 가게 되었을 때,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 집을 떠나 독립할 때
진정한 경계선을 건너고 나면 또다시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변화의 사막을 건널 때 우리는 종종 허상의 국경선과 마주치게 된다.
인생에 있어서 경계선은 중요한 전환점이며 진실의 순간이고, 내적으로 엄청난 성장과 치유를 할 수 있는 기회이다.
국경선의 보초는 우리 안에 있는 정신세계의 일부이다.
허상의 권위에서 나오는 목소리이다.
현재의 나와 앞으로 변화한 후의 내 모습을 가르는 경계선을 건너면 통제력을 상실할까 봐 두려워하는 우리의 자아의 모습이다.
단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특정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마음속 보초가 당신은 열정을 다라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허상의 국경선에서 멈춰 버리면 열정도 죽는다.
허상의 신념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사하라 사막에서나 실제 인생에서나 허상의 국경선은 미적거리며 머물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다.
허상의 국경선에서 멈추는 것이 보초에게 대드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도전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 보초의 허세를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가정과 믿음에 도전하는 것은, 바로 국경 수비대의 허세에 도전하는 것과 같다.
허상의 국경선에 멈춰 섰을 때, 머릿속에서 가장 크게 들리는 목소리, 가장 강력해 보이는 그 믿음은 잘못된 신념이다.
이 잘못된 신념에 도전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이곳에 머물면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는 진짜 진실을 발견했다.
인생이라고 하는 이 여행이 종국에는 끝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때로 우리는 우리를 경계선에 가두어 두는 잘못된 믿음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두려움이 우리의 이성을 가렸거나, 아니면 그 상태에 너무 몰입해서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구분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국경선 보초의 허세를 알아보고 그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념과 용기이며, 때로는 친구의 격려가 필요하다.
허상의 경계선을 넘고 나면 그곳에 더 심오한 진실이 있음을 깨닫기 위해 신념이 필요하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사하라 사막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서 변화의 사막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끝난다.
사막을 다 건넜을 때처럼 진짜 경계선을 알아보고 멈추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우선 사막을 다 건넌 것은 축하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를 기대하지만, 가끔은 자축을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축하를 하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영혼에 자양분을 주고, 즐거움을 키우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축하는 우리가 인생의 여행길에서 순간순간 충실하게 살아왔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진정한 국경선에서 멈추어야 하는 도 다른 이유는 사막에서의 경험을 여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막을 건너고 나서 몇 달 만에 또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깊은 휴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고, 사막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슬픔이나 상실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의식적으로 사막을 건널 때 우리는 유목민이 된다.
사막을 건너는 방법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인생 자체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멈춰 서서 스스로 배운 것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유목민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이제는 몸소 체득한 경험이나 지혜를 즐길 때가 된 것이다.
사막에서의 경험을 흡수해서 자기 인생의 일부로 만들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사막이 끝나고 나면, 지금까지 따라왔던 나침반의 바늘이 아직도 우리 인생에 적절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막이 끝났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는데도 그때까지 따라왔던 나침반의 바늘을 그냥 습관적으로 계속 따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와 함께 한다는 것은 나침반의 바늘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잠깐 멈추어 서서 본인이 걷고 있는 인생의 사막을 돌아보라.
허상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경계선에 도착했는가?
변화, 즉 인생의 전환기나 한 단계의 종식을 알리는 뜨거운 샤워를 한 적은 없는가?
인생의 사막에서 뜨거운 샤워를 찾는 것은 현재의 위치를 깨닫고 현재의 생활에 더욱 충실하며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진정한 경계선을 찾게 되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의미 있는 나침반의 방향대로 갈 수 있다.
진정한 경계선을 건너고 나면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에필로그]
나는 모래를 사랑한다. 세상 어느 곳에 있는 모래든
우리도 사막을 사랑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보냈던 곳이 사막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 앙투안 드 생 텍쥐페리, [바람과 모래와 별들], [사막의 인간] 중에서
해변은 사하라 사막과 유사한 점이 많다.
해변에는 물이 많지만 마실 수는 없다. 매일 아침 마을에서 물을 가져와야 한다.
그렇지만 해변에는 바가 있어 마실 수 있는 음료가 있다.
하지만 그 바는 우리가 마실 것이 필요할 때, 그리고 태양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찾아가는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다.
해변은 사막이고 바는 오아시스이다.
가나 딕스 코브 인근 부수아 플레저 해안
여행을 할 때는 도착했음을 느낄 줄도 알아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그것이 다음 도착지를 향해 내딛는 것임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안에는 여행과 목적지가 공존한다.
누군가 우리에게 사막에 있는지 해변에 있는지 물으면 우리는 필사적이기까지 한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라도 우리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여기에 있다. 현재가 바로 나의 인생이며, 난 이제 여기 도착했다"라고
이와 대조적으로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고, 인생이 순조로울 때에도 우리는 여행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점에서는 이런 순간에도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침반을 점검하고 가고 있는 방향을 잊지 않아야 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막 여행의 규칙을 사용해 볼 수 있다.
포장도로가 갑자기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변화의 사막에 있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항상 인생이라고 하는 사막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라고 하는 큰 사막에서 사막 여행의 규칙을 연습하는 것이 훨씬 쉽다.
실제 인생에서는 변화가 점진적으로 천천히 일어나고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언제 과도기의 부드러운 모래 가루에 갇히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평소에 연습을 해두는 것이 좋다.
사실 예측 가능한 포장도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신기루이다.
인생은 우리가 예측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선원이나 유목민들에게는 인생 자체가 여행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막에서 이동할 때 또는 바다를 항해할 때 그 순간을 최대한 활용한다.
인생은 따분할 때도 있고, 무서울 때, 헷갈릴 때, 지겨울 때, 불확실할 때, 즐거울 때도 있다.
우리는 인생의 하루하루가 그리고 각각의 사막이 어떤 날을 선사해 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멋진 여행을 하기 위해 노력은 할 수 있다.
멋진 여행이란 돈을 들여서 흔들림 하나 없이 길을 달리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단순히 여행하는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태도의 문제이다.
멋지게 여행하는 것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인생의 밀물과 썰물을 평화스럽게 받아들이고, 우리 앞에 놓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면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일자리를 옮기는 중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길을 잃었다면 그 사실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멋지게 여행할 때 우리는 자신을 포함해서 아무것도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할 수 있다.
멋지게 여행할 때, 우리는 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하지 않고 또한 겉모습만 보고 사막을 평가하지 않는다.
사막에는 우리가 처음에 볼 때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많이 내재되어 있다.
호기심에 찬 여행가의 자세로 인생에 접근하면 평범한 여정 또는 힘든 여정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