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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처럼, 우리

칵테일

by 여유수집가

평소엔 민낯에 쭈글쭈글한 티셔츠를 입어도 내게 예쁘다고 하던 그가 말했다.


"수요일엔 예쁘게 입고 와. 화장도 좀 하고."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결혼을 준비하던 우리에게 프러포즈라는 페이지는 이미 지나간 줄 알았다. 예식장도 예약했고, 스드메도 다 골랐고, 양가 상견례까지 마쳤으니 결혼은 이미 '진행형'이었다. 굳이 결혼을 승낙하는 이벤트가 필요할까 싶었다. 동시에 내가 먼저 "언제 프러포즈할 거야?" 묻는 것도 어색해 기대를 없애려 했다.


그에게는 아직 넘기지 않은 페이지였다보다. 야근이 잦던 시즌이었다. 늦은 퇴근에 걱정은 했지만 일찍 퇴근하라는 말은 하지 않던 그가 수요일만큼은 칼퇴를 당부했다. 게다가 나의 스타일까지 간섭하는 모습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준비가 너무 어설펐지만 모른 척했다. 예상 가능한 반전도 사랑 앞에서는 설레는 법이니까.


그날은 유난히 몸이 뜨거웠다. 처음에는 설렘 탓이라 생각했다. 안경 대신 렌즈를 끼고 조금 불편하지만 잘 어울려 아끼던 원피스를 입고 오랜만에 하이힐을 꺼내 신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블러셔를 칠하는데 거울 속 얼굴이 생각보다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알고 보니 진짜 열이었다. 몸은 점점 더 달아올랐고, 39도를 넘겨 결국 반차를 써야 했다.


병원에 들렀다 돌아와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그는 그날 실행하지 못한 계획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호텔 레스토랑 프라이빗룸을 예약했고 장미꽃 100송이도 주문했었단다.


"호텔 룸 예약하려고 진짜 고생했는데..."


그는 아쉬움을 삼키며 웃었다.


"오빠, 그냥 파리에서 해줘. 우리 에펠탑 야경 보러 몽파르나스 타워 가거든. 거기가 좋겠어."


다시 호텔 예약에, 꽃 준비에 고생하지 말고. 이미 진행 중인 결혼이라 어차피 순서는 틀렸으니,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지에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받는 프러포즈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결혼하고 나서 해도 돼?"

"혼인신고 전이니까 괜찮아."


신혼여행은 내 계획이었다. 몰디브에서 푹 쉬고 오자던 그를 설득해 프라하와 파리를 도는 유럽 자유여행을 고집했다. 프라하 4박, 파리 6박. 일정도 모두 내가 짰다. 몽파르나스 타워도 나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선택이었다. 파리 야경을 발아래 두고 에펠탑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고층 레스토랑.


반짝이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달콤한 칵테일을 마시던 그 밤. 그는 말했고, 나는 들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사랑하자."


그 말보다 더 따뜻했던 건 내 손을 꼭 잡은 그의 온기였다.


칵테일은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맛을 완성하는 술이다. 쌉싸래한 베이스에 달콤한 과즙이 섞여 균형을 맞춘다. 우리도 그랬다. 완벽하게 닮지 않았고 다른 부분도 많았지만, 조화를 이루기로 했다. 그 밤의 칵테일처럼 사랑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고 스며들어 한 잔의 온기가 되어가는 것. '결혼 전에 프러포즈'라는 공식을 깼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칵테일을 닮았다. 기성품이 아니라 손수 만들어야 하는 칵테일처럼, 사랑도 취향대로 우리만의 속도로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결국 프러포즈도 우리답게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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