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코레아! 그리고 카바

카바

by 여유수집가

스페인 세비야. 좁은 골목길을 걷다 마주친 식당에 조심스레 들어섰다. 장바구니를 든 사람, 정장을 입은 사람, 거리를 쓸고 있는 사람 모두가 내게 미소를 건네던 도시였기에 가게 안의 소란한 분위기마저 따뜻하게 느껴졌다. 혼자 왔지만 외롭지 않았다.


목소리도 우렁차고 몸놀림도 씩씩한 중년의 여인이 나를 반겼다. 자리에 앉고 보니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내 테이블, 네 테이블 할 것 없이 모두 큰 소리로 웃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니 이 가게에 단골이 아닌 사람 역시 나 혼자로 보였다. 테이블의 경계가 사라져 있었는데 내가 앉자 내 테이블에만 경계가 생긴 듯했다. 외롭지 않다고 여겼는데 묘하게 외로워진 느낌. 하지만 이 감정은 너무 잠깐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가 나를 향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못 알아듣는다는 걸 눈치채고서도 멈추지 않고 온갖 몸짓으로 나를 대화에 끌어들였다. 왠지 저 많은 말 중 '어느 나라에서 왔니?'가 섞여 있을 것 같아 무작정 외쳤다.


"I'm from Korea. Korea.... Corea!"

"Ah, Corea!"

"Corea?"

"Corea!"

"Corea!"

"Corea!"


가게 안이 '코레아'로 들썩였다. 그건 작은 환대의 시작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고른 오렌지 소스 오리고기는 입에 맞지 않았지만 걱정할 틈이 없었다. 누군가는 자기 접시에서 음식을 덜어 내게 건넸고, 누군가는 자신의 테이블로 나를 불렀다. 쭈뼛거리는 나를 본 종업원은 아예 테이블마다 접시를 내밀어 음식을 조금씩 담아 내게 가져다주었다. 가게의 거의 모든 메뉴가 내 테이블로 이사를 왔다.


그러다 한 남자가 내가 마시던 상그리아를 보더니 '아니야, 그건 관광객 술이야!'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금빛 반짝이는 잔을 앞으로 내밀며 열정적인 스페인어를 쏟아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기포처럼 그의 말도 끝이 없었다. 그래도 두 단어는 또렷했다.


"España, Cava!"


잔을 입에 댔다. 상큼하게 혓바닥을 톡 치고 들어와 고소하게 넘어갔다. 풋사과의 산미와 아몬드 같은 부드러운 여운. 내 눈이 반짝였는지 그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었다. 나도 따라 웃으며 이번엔 내가 엄지를 들어 올렸다. 카바 잔 속에서 올라오는 작은 기포들처럼 그들의 친절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작은 동양인 여자가 엄청 중요한 사람처럼 여겨지도록. 그날 나는 여행 책자에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스페인을 만났다. 잔에 담긴 건 카바가 아니라 다정한 오지랖과 집요한 친절이었다.


계산하며 더듬더듬 외웠던 문장을 꺼냈다.


"Por favor, recibo." (영수증 주세요.)


그 말마저도 가게 안 모두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한 잔의 상그리아와 한 잔의 카바에 더해 그들의 환대가 내 얼굴을 붉혔다.


"Adios!"

"Adios, Corea!"


스페인 사람들의 열정적인 친절에 주춤거리기만 했던 내가 마지막 인사는 누구보다 우렁차게 외쳤다. 가게 안 모두에게 들리도록. 크게 원을 그리며 손을 흔들었다. 말로는 표현이 안 되니 덥석 안긴 다정을 온몸으로 알려주고 싶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는 당연했고.


낯선 도시의 식당, 익숙하지 않은 언어. 하지만 그날의 카바는 내게 익숙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처음엔 상큼하게 다가와 끝은 고소하게 오래 남는 다정함. 금빛 찰랑이는 최고급 환대. 그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건네준 진짜 스페인이었다.


*카바: 스페인의 스파클링 와인


keyword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