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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동동주

동동주

by 여유수집가

부슬부슬 내리는 보슬비도, 양동이를 쏟아붓는 듯한 폭우도 아닌 추적추적 내리는 비. 그런 비가 오는 날이면 차장님은 말했다.


“오늘은 이만 접자. 파전에 동동주 어때?”

일하는 내내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는데 그 한마디에 사무실 밖의 공기가 문득 실감 났다. 창문도 열 수 없는 고층 빌딩 안에서 비 오는 날의 습도와 냄새가 느껴질 리 없었지만, ‘파전에 동동주’라는 말은 그 모든 감각을 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차장님의 제안이니 거절하거나 투덜거리기보다는 따라나서기를 택했다.


늘 가는 단골 주점 사장님은 메뉴판도 없이 물었다.


“해물파전에 동동주?”


차장님은 고개를 끄덕였고,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정리하고 나면 단지에 담긴 동동주 한 사발이 도착했다. 투박한 잔과 함께. 차장님은 술이 나오면 호롱박 주걱으로 한 바퀴 휘저어 쌀알을 살폈다. 쌀알이 동동 떠야 제대로 된 동동주라는데, 비싸지도 않은 술을 속여 뭐 하겠다고 가짜 동동주도 있다고 했다.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고도 동동주라 한다나.


투박한 잔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차장님 손에 시선을 두었다. 호롱박 주걱으로 퍼 올리고 따르고 퍼 올리고 따르고. 차장님 잔은 제일 마지막에 채워졌다. 자작하면 재수가 없다며 주걱을 넘겨받으려 해도 그는 첫 잔만큼은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잔을 직접 따랐다. 그러고 나면 파전이 나오기도 전에 벌컥벌컥 모두의 첫 잔이 비워졌다. 물론 시작은 차장님부터였다.


어느 날, 술이 당기지 않아 몇 모금만 홀짝이고 잔을 내려놨더니 차장님이 말했다.


“첫 잔만 비워. 두 번째 잔부터는 알아서 마시고. 첫 잔은 정이잖냐.”


동동주에도 공식이 있다면 그게 차장님의 버전이었을까. 비 오는 날에는 파전에 동동주, 첫 잔은 모두 자신이 직접 따르기, 여기에 첫 잔은 단번에 비워야 한다는 공식 말이다. 그땐 술을 마시는 양이 곧 애정의 깊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기에 두 번째 잔부터는 정말 안 마셔도 될까 싶었지만, 차장님은 자신이 만든 공식을 지켰다. 과장이 내게 권하던 잔을 가볍게 막아주며 했던 말도 기억난다.


“선정이한테 내가 면제권 줬다.”


한 번은 부서에 새로 합류한 대리가 동동주 한 사발을 다 비우고 막걸리를 시켰다. 차장님은 바로 그 주문을 취소하고 다시 동동주로 바꿨다.


“찢어 먹는 파전에는 나눠 먹는 동동주지.”


막걸리도 주전자나 단지에 담으면 되지 않냐는 말에 차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맛이 아니라며. 그러고 보니 동동주가 막걸리처럼 병에 담겨 나온 걸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단지에 담겨, 주걱으로 퍼서 마셨다. 혼자보다는 함께, 따르기보다는 퍼서 나눠주는 술. 분위기를 퍼내는 술이라 비 오는 날에 더 잘 어울리는 걸까.


차장님은 오피스타운 고층 빌딩에 어울리는 세련된 직원이기보다는 묵묵히 자기 방식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가끔 답답하기도 했지만 쉽게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대단하게도 보였다. 꼭 동동주를 좋아하는 사람답게 말이다. 병에 라벨을 달고 자신이 어떤 술임을 당당히 알리는 다른 술과 달리 굳이 단지에 담겨 나와 주걱으로 푹 떠야 제맛이 나는 술. 요즘 같은 시대엔 다소 비효율적이고 촌스러워 보일지라도 그런 방식이 더 깊게 스며드는 힘이 있다는 걸 차장님은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날도 어김없이 추적추적 비가 왔고 우리는 첫 잔을 비웠다. 차장님은 말없이 주걱을 들었고, 퍼담는 술에는 마음도 따라 담겼다. 비 오는 센티함에 일의 무게가 더 묵직하게 내려앉던 밤. 차장님은 어쩌면 그 마음을 우리와 나누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지금 생각해 보면 차장님이 고집했던 건 동동주가 아니라 ‘함께’였는지도 모른다. 추적추적 내리는 밤을 덮어주던 그 따스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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