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맡은 역할이 엄마라.
사춘기 아들과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동우가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작년부터 동우에겐 사춘기가 찾아왔다. 한 달에 키가 1센티씩 크기 시작했고, 변성기도 찾아와 우리 집에서 가장 낮은 톤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만큼 호르몬도 요동치는 시기. 내가 하는 말이라면 모두 '왜'를 붙이는 일명 '엄마 안티'의 시기가 찾아온 건 맞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동우는 오랫동안 태권도를 배워왔었다. 작년부턴 일주일에 한 번은 수영을 하게 되어 태권도와 수영, 두 개의 학원을 다니는 셈이다.
공부에 대해 너무 보챌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공부와 관련된 학원은 보내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도움을 요청한다면, 언제든 도움을 주어야지 생각하고 있다. 아직은 때를 기다려주고 있는 중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동우의 방학은 말 그대로 '방학'이었다. 공부라는 걸 하는 시간이 하루에 채 5분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놀아도 너무 놀았던 대가를 뜻밖의 곳에서 치러야 했다. 입학 후 6, 7교시까지 수업을 받다 보니 몸살을 앓게 된 것. 갑작스러운 피로로 임파선이 부어올랐고, 약이 잘 들지 않아 결국 폐렴까지 가게 되었다. 학기 초부터 친구들에게 본의 아니게 연약남의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 것이다. 아이가 개학을 한다고 잠시 설레었던 나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동우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아이였다. 아토피에 비염, 천식까지. 아픈 날이 많으니 또래보다 작고 왜소해서 영유아검사를 받을 때마다 나를 긴장하게 했다. 종종 마주치는 이웃의 어른들은 내 걱정을 가중시켰다. 아이가 왜 이렇게 작으냐, 잘 안 먹이는 거 아니냐, 아이 입맛에 맞는 걸 좀 해줘라, 우리 손자는 더 어린데 십 센티는 더 크다 등등, 아이를 걱정한다고 건네는 말들이 모두 나를 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말을 들으니 자꾸 생각이 복잡해졌다. 애초에 나는 엄마가 되면 안 되는 사람이었던 걸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의 모든 것이 내가 받은 성적표 같아서.
그런데 다행히도 부정적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종교는 없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신이 나에게 이 아이를 보내 주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신이 사랑받아 마땅한 한 아이를 보내 준 거라면, '엄마'는 내가 맡은 역할인 거니까. 어른이 될 때까지 잘 보살피라는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하니 아이를 대하는 마음도 조금 편안해졌다. 이 아이가 어떤 모습이 건 그저 사랑을 주며 키우면 된다. 아이는 곧 내가 아니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길 바라는 것도 역할을 넘어서는 욕심인 거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말이다.
한 번씩 아이의 부정적인 면이 눈에 들어오면 큰 병을 상상해보곤 한다. 그러면 당장의 문제들은 전부 사소해진다. 아이가 아픈 상상을 하는 건 생각만으로도 불쾌한 일이지만, 사소한 문제까지 내 뜻대로 하고 싶어서 잔소리를 하게 될 땐 어느 방법보다 유용하다. 실제로는 아이가 아프지 않으니 그 또한 기쁜 일이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렇게 아이에게서 한발 물러서 있으려고 노력 중이다. 사춘기라는 시기를 거쳐 어른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이 아이를 조용히 응원해 주자고. 동우는 분명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엄마'라는 역할을 통해서 조금은 호되게 겸손과 감사를 배우고 있다. 아이에게 건강 말고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진 않은지, 평범한 일상을 그저 당연하다 여기고 살고 있진 않은지, 그 사실을 잊을 때가 되면 신은 어떻게 알고 찾아와 예방접종을 한다. 자만하지 말라는 예방접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상이 얼마나 행운 같은 날들이었는지, 아이가 한 번씩 아프고서야 새삼 깨닫게 된다.
왜 이리도 어리석은지. 아직도 나는 갈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