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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서 나오니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12시간의 긴 대화가 마치 잔상처럼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집으로 돌아가 잠들기엔 너무 아쉬웠다. 뜨거운 태양 아래, 작열하는 열기 속에서 나는 조금 더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손을 뻗어 태양을 만지려 했지만, 그것은 닿을 수 없는 꿈일 뿐이었다.
불가능한 욕망에 대한 갈증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태양을 향해 뻗은 손가락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이 마치 내 영혼의 갈라진 틈 같았다. 소음과 열기로 가득한 도시 한복판에서,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덮쳐왔다. 바주인과 내가 12시간 동안 나눈 대화는 현실이 아닌 꿈같이 느껴졌다.
경복궁을 지나 종로를 가로질러 장충단을 거쳐 동호대교를 건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과거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유림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마치 흐릿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을지로의 오뎅집, 동국대 근처의 카페, 장충단 공원의 소나무... 모든 곳에 흔적이 남아있었다.
도시는 변했지만, 내 기억 속 유림은 여전히 그때의 모습이었다. 매 걸음마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며, 나는 마치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자 같았다. 익숙한 거리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푸른 천막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그녀의 다정한 눈빛이 떠올랐다. 오뎅집은 변했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그 순간이 생생했다. 나는 강물 위에 떠다니는 조각배처럼 현재에 떠밀리면서도 과거에 묶여 있었다. 동국대 카페에서 마주한 가을 풍경, 손끝에서 피어오르던 커피 향기, 장충단 공원의 소나무들, 그녀의 미소를 닮은 햇살... 모든 것은 그대로였지만, 그녀만 없었다. 동호대교 위에서 바라본 한강은 여전히 눈부셨고, 스쿠터 뒤에서 들리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메아리처럼 내 귓가에 맴돌았지만, 기억은 붙잡을수록 더 멀어져갔다.
도산공원의 가로수 아래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새 마신 술과 피운 담배가 몸을 휘감았다. 혹사당한 장기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너무나 푸르러서, 오히려 더 눈물이 났다. 내 몸의 고통은 마음의 아픔을 덮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너져 내리는 내면의 풍경 속에서, 나는 새로운 나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이대로 잠이 들었고 어느새 밤의 어둠이 나를 감싸 안았다. 잠든 나의 얼굴 위로 달빛이 부드럽게 내리쬐었고, 밤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 목록을 천천히 훑어봤다. ㄱ, ㄴ, ㄷ, ㄹ... 초성들을 넘기다 유림에서 잠시 멈췄다. ‘잘 지내’라는 짧은 말을 적어볼까 하다가, 결국 손을 멈추고 다시 목록을 내렸다. 그러다 '엄마'라는 이름에서 손이 멈췄다.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역류하는 듯했다. 모든 고통과 상처, 그리고 성장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이름 앞에서 나는 다시 엄마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도, 그 이름은 나에게 안식을 주었다.
"나야...."
"어? 네가 웬일이니... 잘 지내지?"
"응... 그냥, 뭐..."
"그래... 그런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니야... 그냥....다음에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도시의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며,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
차에 올라타기 전, 문득 그 바가 생각났다. 경복궁역 근처를 헤매며 바를 찾아다녔다. 골목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그 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꿈속 장소를 현실에서 찾는 것 같았다.
"여기 있었는데..." 나는 중얼거렸다.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으면서도 전혀 다른 풍경에 혼란스러웠다. 마치 평행우주에 온 듯했다.
결국 바를 찾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차로 돌아왔다. 차 안에 앉아 잠시 눈을 감자 바에서의 기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부순환로로 진입하자 서울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빛나는 고층 빌딩들과 끝없이 이어지는 차들의 행렬. 차창 밖 풍경들이 내 인생의 순간들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고성을 향해 달리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왔다. 음악은 내 복잡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서울을 벗어나자 도로는 점점 어두워졌고, 주변 풍경도 변해갔다.
도시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는 동안, 내 마음은 여전히 그 바에 머물러 있었다. 사라진 바를 찾아 헤매며, 나는 내가 찾는 것이 단순한 장소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시간이었고, 추억이었고, 어쩌면 나 자신이었다. 사라진 바처럼, 과거의 나도 이제는 찾을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새벽녘, 고성의 해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모래사장을 걸었다. 차가운 모래가 발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파도 소리가 귓가를 채웠다. 짙은 바다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멀리 언덕 위에 엄마가 산다는 펜션이 보였다.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 저곳에 가면 엄마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은... 아직은 갈 수 없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일출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금빛과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아름다움에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은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번개와 같다는 불경의 구절이 떠올랐다.
모래 위에 남은 나의 발자국은 파도에 씻겨 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자국들은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바다의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스치는 바람은 마치 시간 그 자체였다. 그 바람은 과거를 어루만지고, 현재를 감싸안고,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갔다.
엄마가 사는 집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곳에 가면 새로운 시작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이대로, 저 바다로, 미지의 블랙홀로 사라지기로.
노란 태양이 떠오르고, 새벽녘 푸른 어둠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광활한 바다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무한한 우주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 작고 덧없어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기억은 어떤 별보다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내게 남은 사랑의 기억은 영원할 것이다. 그럴 것이다. 내가 언제 어디로 가든지.
Apocalypse
연인들의 이마에 키스를 건네며
너의 품 안에 감싸 안긴 채
어두움에 버려진 피아노 속에
그들을 숨겨 놓았지
네 입술
나의 입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