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녀는 절대 프렌치 키스하지 않아
https://www.youtube.com/watch?v=mHQyGObo15A
추천 위스키: Glenfiddich 15 Year Old Solera
"외국 여자와 만난 적 있어요?"
바 주인은 잔을 닦으며 무심코 물었다.
나는 잠시 술잔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몇 번 있었죠. 각자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
"어떤 점이 달랐나요?"
바 주인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였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글쎄요...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고, 개인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표현 방식이 좀 달랐어요. 더 직설적이면서도, 어떤 면에선 더 신중하달까."
바 주인은 유리잔을 천천히 닦으며 관심 있게 물었다.
"어떤 점에서요?”
"음, 예를 들면 나이나 직업, 경제적 조건 같은 걸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알아요. 그래서 기억에 남는 외국인은 없나요?“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줄리엣이라는 프랑스 여자가 있었어요. 그녀는... 좀 인상 깊었어요.”
"어떤 점에서요?" 바 주인이 물었다.
"그녀는 마치 바람 같았어요. 자유롭고, 예측할 수 없고... 하지만 동시에 지독히 외로워 보이기도 했죠. 그녀의 눈 속에는 항상 어딘가 먼 곳을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이 있었어요."
4월의 어느 날,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서 만났다. 초록으로 우거진 플라타나스 나무 아래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속에서, 분수대 옆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녀의 긴 갈색 곱슬머리가 어깨를 스치며 흔들렸고, 그녀의 눈 밑 짙게 패인 다크서클이 인상 깊었다.
“그 다크서클은 마치 그녀가 겪어온 수많은 밤의 고독을 말해주는 듯했어요.”
우리는 광화문 광장을 벗어나 경복궁 옆 아름다리 큰 나무 옆 잔디밭에 들어가 인왕산으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자연스레 누웠다. 줄리엣은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며, 오후 네 시의 풍경 속에서 자유로이 햇살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랜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한 꽃처럼 아름답고 애잔했다.
“파리 날씨 잘 알지? 난 다음에 태어나면 푸켓에 있는 잔디로 태어나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뜨거운 햇살에 대한 찬사가 동시에 묻어 있었다.
"그녀는 해를 좋아했어요.”
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리에서 날 좋은 날은 손에 꼽히기도 하죠."
"맞아요." 나는 동의했다.
"당시 줄리엣은 창문 없는 고시원에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알았죠. 왜 다크 서클이 그렇게 짙었는지. 뭐랄까, 이끼 속에서 빼꼼이 피어난 버섯 같다랄까요? 그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나는 바 주인에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에 뭔가가 울렸어요. 그녀에게 필요한 건 단순히 햇빛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의 집이란 걸 느꼈죠."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다시 광화문 광장 옆에 분수대에 들어섰다. 그때 한 쪽 구석에서 알록달록한 LED 조명이 들어있는 아크릴 풍선이 눈에 보여 줄리엣에게 선물로 줬다.
“고시원 방에 창이 없다고 했지? 이 풍선이 너의 공간을 밝게 비추어 줬으면 좋겠어.”
나를 바라보는 줄리엣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잠 그렇게 서있었다. 그 순간 나는 줄리엣이 느꼈을 외로움과 그리움을 온전히 느꼈다.
데이트가 끝난 후, 줄리엣에게 고시원 침대 위에 올려진 알록달록한 풍선 사진을 받았다. LED 풍선이 침대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며,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 빛이 어우러져 작고 어두운 고시원 방은 마치 다른 세계로 변한 듯했다.
바 주인은 코끝으로 내려간 볼록렌즈 안경을 다시 콧등으로 올리며 말했다.
“그 사진을 보여 줄 수 있어요? 어머나.. 뭔가 마음이 짠하네요.”
줄리엣의 어린 시절은 부모의 이혼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녀의 삶은 마치 떠돌이 구름처럼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며 뿌리 없이 흘러갔다. 성인이 되어 세계를 누비며 살았지만, 그녀의 가슴 한 켠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자리했다. 발걸음은 자유로웠지만, 그녀의 영혼은 여전히 안식할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줄리엣에게 '집'이란, 벽과 지붕이 있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그녀의 방황하는 마음이 마침내 쉴 수 있는 안식처였다.
“줄리엣은 항상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정확히 뭘 찾는지는 그녀도 잘 모르는 것 같았죠. 그래서 제가 제안했어요. 비자 만료가 되어, 한국을 떠나기 전 까지 고시원이 아닌 우리 집에서 같이 있자고요."
나는 집이 없는 그녀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녀는 마치 과거의 집 없이 떠돌아다녔던 나 같았다. 이후 줄리엣은 우리 집에서 함께 2주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 음식을 해 주었으며 최대한 따듯하게 사람의 온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자 다크서클이 심했던 그녀의 얼굴이 곧 환한 배꽃의 색처럼 건강한 혈색으로 돌아왔다.
"줄리엣은 결국 어떻게 떠났나요?" 바 주인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아침, 짧은 편지만 남기고 사라졌어요. '계속 움직여야 해요. 그게 제 운명인 것 같아요.'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바 주인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때로는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해요.“
"그런데 " 바 주인이 물었다. "프랑스 여자라고 했죠? 키스는 어땠어요? 정말 프렌치 키스했나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요, 전혀요. 오히려 굉장히 부드럽고 섬세했어요. 줄리엣은 결코 프렌치 키스를 하지 않았어요."
바 주인도 함께 웃으며 말했다. "역시 고정관념은 깨지기 마련이군요.“
“혹시 배고프지 않아요?” 바 주인은 조용히 물었다. “프랑스 사람 이야기 들어서 말하는데, 잠봉뵈르 먹고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봉뵈르는 아니겠지만, 뭐 어때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줄게요.”
그녀는 천천히 바 뒤편으로 걸어가, 냉장고에서 신선한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햄, 버터, 바게트, 그리고 약간의 피클. 그녀의 손길은 마치 프랑스의 어느 작은 비스트로에서 일하는 셰프처럼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바게트를 반으로 갈라 버터를 두툼하게 발랐다. 그런 다음, 햄을 정성스럽게 얹고 피클을 곁들였다.
“자 먹어 봐요.”
나는 그녀가 만든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고소한 버터와 짭짤한 햄, 그리고 아삭한 피클의 조화가 입 안 가득 퍼졌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서울의 밤거리를 걸으며 나눴던 대화, 한강 공원에서 함께 바라보았던 노을빛 등 그 모든 순간이 마치 꿈처럼 아름답고 덧없었다.
“줄리엣이 마음의 집이자 영원한 안식처를 찾길 바래요.”
"네, 저도 그렇게 바라요. 어디에 있든 줄리엣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녀가 떠난 후에야 깨달았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잠시나마 '집'이 되어주었다는 걸요."
나는 핸드폰을 꺼내 줄리엣에게 받은 사진 속, 침대 위에 걸어놓은 LED 풍선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