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준영 Nov 17. 2024

Sunsetz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5-rbSNzU_b8


추천 위스키: Talisker 10 Year Old



"삼십 대를 앞둔 무렵, 가을의 어느 날, 망원동에 있는 1인 미용실을 방문했어요. 그곳에서 유진을 만났죠.”     

"유진은... 아리를 닮았어요."

"아리?"

"네. 애니메이션 '닥터 슬럼프'의 아리를 닮았어요. 귀엽고 소녀 같은 얼굴이었어요.”   

  

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그저 미용실 손님과 미용사의 관계였어요.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가 같은 책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죠. 그때부터 조금씩 가까워졌죠."
     

바 주인은 관심 있게 들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유진은 이혼 경험이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그녀의 밝은 에너지와 지적인 매력에 끌렸죠. 6개월 정도 사귀었을 때, 그녀가 갑자기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요.’라고 말했어요. 5억이 넘는 통장 잔고와 함께.”     


“사귄지 얼마 안 됐는데, 안 놀랬어요?" 바 주인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죠.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사실 유진은 저보다 10살이 많았거든요. 그녀에게 아이를 갖는 것은 매우 절실한 문제였던 거죠.”     


바 주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여자에게 있어 출산은 매우 민감한 문제죠. 특히 나이가 들수록 더 그래요. 그 마음이 이해는 가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의 마음을 더 이해했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그저 부담스럽고 두렵기만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바 주인이 물었다.    

 

"결국 제가 도망갔어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가끔 연락이 왔어요. '오늘 밤 만큼은 제발 같이 있어줘.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아. 미안해. 잠만 재워줘.'라고요.”   

  

"그때마다 저는 약해졌어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진이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줬죠.”     


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 기울였다.     


"몇 번이나 그녀의 집에 갔어요.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야'라고 다짐하면서요. 하지만 그녀의 눈물 어린 얼굴을 보면 모든 결심이 무너져 내렸죠.”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어느 날, 유진이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나왔어요. 양성이었죠. 하지만 저는 그게 거짓말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사실 저는 오래전에 정관 수술을 받았었거든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저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왔어요.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았죠. 한 달 뒤, 그녀에게서 마지막 메시지가 왔어요.”     


"'미안해. 내가 너무 나갔어. 너무 붙잡고 싶은 마음에 이런 짓을 했어. 용서해줘. 이제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게. 잘 살아."     


바 주인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외로움과 절박함이 느껴지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그저 도망치고 싶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 주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후로 그녀는 어떻게 됐나요?”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1년 후에 우연히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보게 됐어요. 만삭의 모습으로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더라고요.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바 주인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말했다. "결국 유진 씨가 원하던 걸 얻은 것 같네요. 하지만 그게 정말 아이였을까요? 아니면 손님과의 안정된 관계였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둘 다 원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그녀는 새로운 사람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이루었군요.”     


바 주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손님은 어때요?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안도했나요, 아니면 뭔가 아쉬움이 남았나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복잡한 감정이 들었어요. 안도감, 후회, 질투... 모든 게 뒤섞여 있었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물론, 가끔은 '만약에...'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마포에 30평대 아파트에서 살면서, 그녀의 일이 끝날 때마다 데릴러 나와 셔터를 내리고 일상을 마무리하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죠. 주말이면 중형 외제차를 몰고 한강공원으로 나들이를 가고... 귀여운 딸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 해봐요. 아이가 아빠를 닮아 호기심 많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빠, 저건 뭐야?'라고 묻는 모습도요.”


나는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판을 집어들었다.   


"그런 상상을 가끔 해요. 하지만 동시에, 그런 삶이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 저는 아직... 아니, 어쩌면 영원히 그런 삶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인스타그램을 열어 유진 가족의 단란한 사진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 유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과 아이를 껴안고 있었다. 그들의 행복이 사진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화면을 닫았다.

이전 09화 Nothing gonna hurt you bab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