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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Jun 23. 2016

애플의 맹장

애플의 흔적 기관 아이팟 셔플

©Apple


애플의 제품군을 일종의 국가로 봐도 될 것 같다. 각 기기가 모여 국가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라인업이 된다. 손님들은 그 중 하나만 사서 써도 애플이 만들어둔 세계로 빨려들어간다. iOS와 아이튠스의 자동 동기화나 아이클라우드 데이터 백업은 사용자를 애플에 붙잡아두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요즘에는 이런 걸 통합 생태계 같은 멋진 말로 표현한다. 중독성 강한 다단계 같은 말로 표현해도 어감 차이를 빼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이팟 셔플은 애플 국가의 다른 기기와 꽤 달라 보인다. 액정이 없고 인터넷 연결도 안 된다(인터넷 연결이 되는 PC는 필요하다). 앱을 깔아 온갖 기능을 하는 애플의 체급별 컴퓨팅 제품과 달리 음악 재생과 셔플, 보이스 오버만 된다. 그나마 보이스 오버는 3세대부터 추가되었고 처음에는 있지도 않았다. 액정도 없는 재생 전용 MP3 플레이어가 애플이라는 이름으로 11년 동안 팔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보려면 아이팟 셔플이 처음 나온 2005년으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스티브 잡스는 맥월드에서 정말 중요한 걸 “One more thing(하나 더)”이라 말하며 쏙 꺼내는 일로 애플 팬을 열광시켜 왔다. 아이팟 셔플은 2005년의 ‘원 모어 띵’이었다. 당시 그의 프레젠테이션 영상은 아직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걸 보면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하는구나 싶어진다.


아이팟 셔플이 나오기 1년 전인 2004년은 MP3 플레이어 시장에서 아이팟의 비중이 31%에 불과했다. 시장의 60%이상이 플래시 메모리 MP3 플레이어의 차지였다. 그래서 애플은 아이팟 미니를 출시했고 1년 후 애플은 MP3 플레이어 시장의 90%이상을 점유했다. 애플은 시장을 틀어쥐기 위해 더 작고 싼 걸 만들 필요를 느꼈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걸 한참 설명하던 중 목걸이 액세서리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이팟 셔플을 꺼내 왔다.


11년 전의 “원 모어 띵.” 당신은 11년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Apple

아이팟 셔플은 배포의 산물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에서 소형 플래시 메모리 MP3 플레이어 시장을 동물원이라고 표현했다. 종류가 너무 많았는데 모두 AAA 배터리를 쓰고 작은 액정을 달았다. 액정과 AAA 배터리라는 제한 안에서는 비슷한 모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애플은 정 반대 개념에서 시작했다. 액정을 빼고 내장 배터리를 썼다. 액정을 빼자 가격도 빠졌다. 당시 256MB 용량의 MP3 플레이어는 프레젠테이션에 의하면 149$정도였으나 아이팟 셔플은 512MB 모델이 99$였다. 당시의 경쟁자 중 이걸 만들 기술이 없는 회사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남들 다 하는 걸 안 할 용기가 있는 회사도 없었을 것이다. 애플은 남들 안 하는 걸로, 최소한 그런 이미지로 그 자리까지 갔다. 아이팟 셔플은 그야말로 스티브 잡스스러운 뻔뻔함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11년이 지났다. 테크 업계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실제로 그랬다. 2007년 첫 아이폰이 나왔다. 같은 해 애플은 회사 이름에서 컴퓨터를 뺐다. 2011년 애플은 세계에서 가장 시가총액이 높은 회사가 됐다. 같은 해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 2014년 애플은 애플 워치를 발매했다. 같은 해 아이팟 클래식이 단종됐다.


애플은 회사 이름에서 자신들의 출발점을 떼어냈지만 굉장히 촘촘한 개인용 컴퓨터 라인업을 완성시켰다. 애플 워치,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에어, 맥북 프로, 아이맥까지. 자신의 창조주였던 스티브 잡스를 보내고도 그가 꿈꾸던 강력한 수직통합적 생태계를 구축했다. 웨어러블 컴퓨터부터 일반 PC까지, 1.5인치 크기의 애플 워치 38mm부터 27인치 모니터의 아이맥 레티나 5K까지. 애플은 새롭다, 멋있다, 애플스럽다는 이미지를 유지하며 어느 순간부터 계속 뭔가 다른 것이 되었다. 비싸고 우아하고 까다로운 하드웨어를 만들던 회사가 음악이라는 소구점 넓은 즐길거리를 내세워 시장을 만들고 사세를 엄청나게 넓혔다. 음악 다음엔 전화기였고 전화기 다음엔 태블릿이었다. 그 변신은 스티브 잡스가 죽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늘 새로우려면 늘 냉정해야 한다. 애플은 돌아본 적이 없었다. 조나단 아이브가 사랑한 흰색 플라스틱은 이제 애플의 물건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대신 산화 피막 알루미늄을 사랑한다. 그거 덮고 잘 것 같을 정도다. 팀 쿡은 스티브 잡스식의 심술궂은 예술가적 고집을 많이 걷어냈다. 지금의 애플 라인업은 삼성을 비롯한 다른 회사처럼 디스플레이 크기에 따라 무척 촘촘하다. 이들의 터치스크린 디바이스인 애플 워치, 아이폰, 아이패드의 스크린 사이즈를 다 합치면 7개나 된다. 그 중에서도 상징적인 변화가 아이팟 클래식의 단종이다. 클릭휠이 사라진 것이다. 애플과 타 MP3 플레이어 회사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애플은 스스로 과거로 흘려 보냈다. 애플에 클릭휠이라는 인터페이스가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현행 기기는 이제 아이팟 셔플 뿐이다. 그 역시 진짜 클릭휠은 아니지만.


아이팟 셔플 세대별 변천사. 솔-도-미-도. ©Apple

아이팟 셔플도 꾸준하게 진화했다. 소재는 플라스틱에서 산화 피막 알루미늄으로 변경되어 지금에 이른다. 배터리 성능이 향상되어 스펙상 15시간 연속 재생이 가능하다. 저장장치가격 하락에 따라 용량 대비 가격은 떨어졌다. 3세대부터 보이스 오버 기능도 추가되었다. 무게도 22g에서 12.5g으로 줄었다. 케이스를 이루는 부품의 수도 간소화됐다. 아이팟 셔플 2세대와 4세대는 거의 비슷하게 생겼지만 케이스를 이루는 부품 개수는 다섯 개에서 두 개로 부쩍 줄었다. 부품이 적어지면 조립 불량률도 떨어진다.


아이팟 셔플은 아직도 효과적으로 엔트리급 애플이라는 기능을 수행한다. 6만5천원이면 애플의 유니보디 케이스를 손에 넣고 그 질감을 만질 수 있다. <인사이드 애플>에는 ‘애플 디자이너는 전통 산업디자인 프로세스에 업무의 10%만 투자하고 나머지 90%는 제조 팀과 협력해 구상한 아이디어를 제품화하는 데 쓴다’거나 ‘재료를 제대로 이해하면 제품의 구조가 바뀌기 시작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애플의 유니바디 케이스다. 애플은 자사의 최저가 모델인 아이팟 셔플에도 스스로의 철학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아이팟 셔플은 애플 생태계에서 특이한 위치로 살아남는다. 엔트리 애플이 되어 소비자를 생태계로 끌어들인다. 애플 생태계에 편입됐더라도 하나 더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액정이 없을 뿐 아이튠즈와는 편리하게 연결된다. 골수 애플 팬도 인터넷과 연결되지 않고 노래만 들으면서 조깅이나 하고 싶은 순간이 있을 수 있다. MP3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지금 이 가격에 저 정도 완성도를 보이는 기계는 많지 않다. 애플 입장에서도 부담이 없을 것이다. 아이팟 셔플 4세대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색만 다르고 모양은 같다. 생산설비가 여전한데 물건을 계속 찍으면 마진율이 높아진다. 물건이 작으니까 물류비용도 부담 없다. 괌은 본토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미국의 태평양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아이팟 셔플이 애플에서 하는 역할도 비슷하다.


아이팟 셔플은 애플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려주는 흔적 기관같은 물건이다. 모양뿐이라도 클릭 휠이 남아 있고 이들이 음악이라는 기회를 만났음을 상징하는 음악 전용 재생 기능이 남아 있다. 맹장은 척추동물의 작은창자에서 큰 창자로 넘어가는 부분에 있는 부분이다. 진화 과정에서 퇴화된 쓸모 없는 기관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으나 사실은 면역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래도 문제가 생겼을 경우엔 적출해도 큰 지장은 없다. 진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큰 상관은 없다, 이거야말로 아이팟 셔플 아닌가.


아이팟 셔플이 최고의 MP3 플레이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아이팟 셔플과 동일한 액정 없는 2G용량 MP3 플레이어는 현재 2만원대다. 액정이 달리고 아이팟 셔플보다 저장 용량이 큰 것도 3~4만원대다. 하지만 아이팟 셔플은 비싼 MP3 플레이어가 아니라 제일 싼 애플이라는 이름표가 붙는다. 아이콘이 된 소수만의 특권이다. 아이콘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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