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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May 12. 2019

방송작가는 왜 월급이 아닌 페이를 받을까

사업장 없는 개인사업자


우리는 모두 언어 속에서 산다. 아무리 나 같은 백수라도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드물다. 하다못해 친구와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거나, 고장 난 정수기 AS를 신청하기 위해 전화 속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자음과 모음, 단어와 문장 사이를 유영하는 것이 삶이다. 그 가운데서도 무언가를 정의하는 '단어'란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다. 맘충이란 단어 하나로 불특정 다수의 아이 엄마들이 속앓이 하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다.


사례가 하나 더 있다. 최근 '근로' 대신 '노동'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심지어 지난해 정부가 근로를 노동으로 대치하는 헌법개정안을 제출했다. 관련해서는 양승광 님이 올리신 '노동이냐, 근로냐'라는 글을 마침 본 참이다. 같은 날을 의미하는 '근로자의 날'과 '노동절'은 어떤가?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졌다면 그것이 바로 단어의 힘이다.


방송작가로 살면서 늘 한 단어가 궁금했다. 급여를 논할 때면 연봉이나 월급이 아닌 '페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무슨 불문율 같았다. 작가 선배도, 피디 선배도 모두 꼭 페이라는 단어를 썼다. "페이는 얼마로 책정됐니?", "막내작가 페이는 %$@정도란다" 연봉도 있고 월급도 있을 텐데 왜 페이라는 단어만 사용하는 걸까 궁금했다. 후에는 하도 많이 들어서 그 단어 자체는 익숙해졌지만, 늘 마음 한 구석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섭외가 하도 안되어서 동동거리며 전화를 돌려대던 어느 날, 두세 시간을 전화통에 매달려 있다가 겨우 어렵게 인터뷰 허락을 받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사무실 전화기를 내려놓다가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왜 '페이'라는 단어가 이질적이었는지. 밥 먹다 모래 씹을 때처럼 유독 그 단어가 어금니에 걸렸는지. 내가 노동자인데 노동자가 아니라서 그런 거였다.




나는 작가인가 잡가인가 노동자인가 사업자인가 혼란이 오고 마는데



노동자인데 노동자가 아니라니, 이 무슨 말장난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내가 아는 한 방송작가들은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회사대 노동자로 계약을 하는 게 아니라, 계약서를 쓰더라도 프리랜서 계약을 한다. 그래서 연말정산이 아니라 개인사업자로 분류되어 5월에 종합소득세 정산을 한다. 사업자번호도 없는데 개인사업자가 되는 아이러니다. 그래서 월급이라는 단어가 맞지 않는 거였다. 맙소사, 자욱하던 머리가 번뜩하더니 정리가 된다. 그래서 페이였구나!


문제는 대부분의 방송작가들이 방송국에 상주하면서 근무를 하고,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있으며, 야근도 하고 간혹 출장까지 다닌다는 것이다. (지난 4월에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전국 방송작가 580명을 상대로 실태조사를 진행한 결과 본인이 프리랜서 형태로 고용되어 있지만 상근 한다는 대답이 72%였다. 출처는 이곳)


비단 방송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습지 교사와 요구르트 판매원, 간병인, 퀵서비스 기사, 트레일러 기사, 대리운전기사... 이들 직군 역시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특수고용 노동자'라는 낯선 위치에 놓인다. 의무는 노동자와 똑같지만, 노동 3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페이'가 교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페이라는 단어 안에는 야근수당이 없다. 교통비도 식비도 없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들이 이 단어로 인해 지워진다. 작가들은 밤샘 야근을 하고도 청구할 곳이 없다. 회당 얼마의 페이를 받는, 야근수당을 약속받지 못한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돌이켜보니 페이란 참 얼마나 편리한 단어인지.


그래서, 방송작가들은 월급을 월급이라 부르지 못한다. 홍길동도 아닌데. 상근 하는 작가들에게는 페이가 아닌 월급이 지급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업장 없는 개인사업자가 아닌, 정당한 노동자로서 말이다. 상근 하는 작가들의 '호월호급'을 허하는 날은 언제가 될까. 오늘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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