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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도 영화감독이 되어야 한다

AI의 시대, 카피라이터의 미래

by 카피J

AI가 무섭다.


클릭 몇 번이면 제법 그럴듯한 광고 그림을 쉽게 만들어낸다. 그림뿐인가. AI 동영상 제너레이터를 쓰면, 간단한 프리미어 편집만으로도 15초짜리 광고 영상를 만들 수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CM송이나 챌린지 송 같은 경우 실제 온에어를 해도 무방할 수준이다.


그렇다면 광고 카피는 어떨까?

직접 써본 결과, 바디카피나 상세설명 같은 긴 글은 꽤 괜찮다. 하지만 짧고 압축적이어야 하는 키카피나 헤드라인은 여전히 뭔가 아쉬웠다. 한국어의 미묘한 뉘앙스,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다의성을 완전히 잡아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휴~ 다행이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AI 발전 속도가 하루가 다르기 때문이다. 언제 갑자기 전문 카피라이터 수준의 카피를 자판기처럼 뽑아내는 AI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요즘 보면 그런 일이 당장 몇 달 뒤에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카피라이터에서 '카피셀렉터'


그러면 카피라이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카피라이터도 이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단순히 카피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카피를 '선택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선택한다'는 건 그냥 마음에 드는 문장을 선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훨씬 더 전략적이고 설득적이며 세심한 과정이어야 한다.


모든 브랜드는 크든 작든 나름의 고민을 안고 있다. 어떤 브랜드는 젊은 층과 친해지고 싶어하고, 어떤 브랜드는 1등 이미지를 강화하면서 시장을 더 넓히고 싶어한다. 카피를 선택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브랜드의 고민과 직결되어야 한다. AI가 써주는 수백, 수천 개의 문장 중에서 정말로 브랜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카피는 무엇인가?


그리고 키카피와 헤드라인은 대부분 짧고 압축적이야 하기 때문에, 한국어의 다의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찐 이유(다이어트)"라는 카피를 보자. 여기서 '찐'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살이 '찐' 이유이면서, 동시에 살이 찐 '진짜' 이유. 또 다른 예로 "반값습니다(50% 할인)"는 어떤가. 50% 할인된 '반값'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발음이 유사한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말의 뉘앙스가 겹치면서 짧고 임팩트 있는 카피가 완성될 수 있었다.


AI가 아직까지는 이런 언어유희를 잘 이해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언젠가는 이런 부분까지 완벽하게 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전까지는 카피라이터가 AI와 대화하고 조율하면서 카피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카피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역할의 두 번째 변화는 책임이다.


앞으로 더 중요한 건, 카피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결과에 대해서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전문가냐 아니냐가 될 것이다. 오직 그런 사람 만이 AI에게 대체되지 않는다.


AI가 제안하는 수많은 문장 중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브랜드 이미지나 정체성과 어긋나는 경우가 있다. 참신하지만 지나치게 가볍다거나, 지금 당장은 유행이지만 금세 촌스러워질 수 있는 표현들 말이다. 카피라이터에게 필요한 책임이란, 브랜드의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카피들을 정확하고 적합하게 선별해내는 일이다.


여기에 하나 더. 모든 언어는 살아있다. 시대가 바뀌면 사회적 맥락도 빠르게 변한다. 어떤 밈이나 표현은 특정 군집에게는 친근하게 다가가지만, 다른 군집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 이런 미묘한 줄타기를 하며 판단하고 조율하는 것 역시 결국 사람, 그러니까 카피라이터의 책임이다.


AI는 카피에 책임지지 않는다. 카피가 논란이 되고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고 해도 AI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다. AI에게 "이거 왜 이렇게 썼어?"라고 따져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카피는 거들 뿐, 디렉터가 되어야만 한다



사실, 영화감독은 직접 하는 일이 없다.


연기는 배우가 하고, 촬영은 촬영감독이 하고, 대본은 시나리오 작가가 쓴다. 의상팀도 미술팀도 음악감독도 따로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감독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왜일까? 감독이 하는 일이 '선택'과 '책임'이기 때문이다.


배우를 선택하고, 시나리오를 선택하고, 현장에서 어떤 컷을 OK할지 결정한다. 편집실에서는 어떤 장면을 남기고 어떤 장면을 잘라낼지, 그리고 어떤 음악을 얹을지까지. 영화감독은 선택으로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그 영화의 성패를 온전히 책임진다. 영화가 망하면 감독은 한동안 일거리를 구하기 어렵겠지만, 배우나 다른 스태프들은 언제든 다른 영화를 찍으면 그만이니까.


카피라이터도 결국 영화감독이 되어야 한다.


언젠가 AI가 수많은 카피를 순식간에 써서 우리 앞에 내놓을 것이다. 그중에서 어떤 카피를 OK할지, 어떤 카피를 수정하고 다듬을지, 어떤 카피를 최종적으로 세상에 내보낼지를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 그것이 살아남는 카피라이터들의 필수 역량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림과 영상, 음악까지 아우르는 광고 디렉터로 영역을 넓히는 것만이 AI 시대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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