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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를 끌고 옛 직장 동료를 만나러 갔다

by 진솔

회사 다닐 때 친하게 지냈던 남자 동료가 있었다. 직원이 몇 안 되는 사업부에서 이런 저런 잡다한 일들을 같이 하다보니 친해졌다. 둘이 같이 외근도 나가고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랬는데 쿵짝이 잘 맞았다. 생각해보면 잘 맞는 게 아니라 그 동료직원이 일방적으로 나한테 잘 맞춰준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시절 그에게 많이 의지했고 같이 열심히 으쌰으쌰하면서 일하는 게 좋았다. 그러나 미리 밝혀두건대 인간적으로, 친구로서 좋았던거지 이성적인 호감은 전혀 없었다.


우리는 제품 홍보를 하기 위해 매년 코엑스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나갔다. 전시회 직전에는 일이 많아 주말에도 회사에 나갔고, 전시회 기간에는 내내 부스를 지켰다. 몸은 피곤했지만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 열정적으로 즐겁게 일하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그 동료 직원이 있었기에 재밌게 일할 수 있었다. 전시회 때 이상한 사람이 왔다가면 같이 흉을 봤고 점심 때가 되면 “뭐 먹을까요?”하면서 코엑스 맛집을 찾아다녔다. 그는 직장 동료 이상의, 회사 일과 상관없는 인생 얘기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친구였다.


그런데 내가 결혼하고 임신해서 회사를 휴직하게 되었다. 사실 임신한 상태로 회사에 다닐 때쯤에는 회사에 신물이 나서 모든 게 지긋지긋해진 상태였다. 나는 그 동료직원을 불러내어 ‘전처럼 일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동료직원에게는 내 입장을 미리 알려야할 것 같았다. 어차피 나는 얼마 뒤면 휴직에 들어갈 예정이었고 회사를 그만 둘 생각도 있었다. 그때는 그저 휴직하는 날까지 버티자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너그럽게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날 한 번은 소심한 그만의 방식으로 내게 불만을 내비치기도 했던 것 같다. 말로는 알겠다고 했지만 내가 일에서 손을 놓아버린 데에 대한 배신감과 서운함을 느꼈던 거다. 그즈음 나는 다른 사업부 일을 맡아서 하기도 했으므로 그걸 핑계로 기존사업부 일과 거리를 두었다.


출산 후 거의 육아 우울증에 걸렸던 시기에 그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이맘 때쯤 코엑스 전시회에 나갔던 게 생각났고 다시 한번 전시회장 분위기도 느껴보고 그도 만나 회포를 풀고 싶었다. 집에서 코엑스까지 가는 게 멀었지만 유모차를 끌고 코엑스까지 갔다. 어차피 유모차를 타야 아이가 잤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게 나았다.


전시회장 입구에서 그가 나왔는데 생각보다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같이 밥 먹자고 했더니 밥은 부스를 지키고 있는 '아름씨'랑 먹어야된다고 했다. 내가 휴직하고 나 대신 들어온 직원이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아티제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그가 말했다. 유모차 끌고 뭐하러 여기까지 힘들게 오셨냐고.


회사에서 열정적으로 일하던 때가 그리웠던 걸까? 아니면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단순히 내가 있었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러나 나는 완전히 아름씨로 대체되어 있었고 그에게 이미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그는 전환이 빠른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아티제 화이트롤을 먹는데 그 하얀 롤에 내 립스틱이 묻었었다는 점이다. 창피했다. 일하는 사람 불러내서 내가 좋아하는 화이트롤을 시킨 것도, 먹으면서 립스틱이 묻은 것도 그 동료에게 추하게 보일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유모차를 끌고 나온 세상에 뒤처진 아줌마였다. 좋았던 시절을 잠시 맛보려고 그를 찾아갔지만 그에게 중요한 사람은 이제 완전히 내 뒤를 이은 ‘아름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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