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
드디어 엔초비 캔을 땄다. 딱 보기에도 1인분이 아닌 양이다. 몇달을 미루었다. 혹시 손님이 오면 그 때 까서 한번에 다 쓰고 싶었지만, 놀러온 손님은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선호해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또 한참 지나서는 도저히 이 엔초비를 미룰 수가 없었다. 나는 엔초비가 들어간 토마토 파스타를 좋아했지만, 바질페스토도 있으니 토마토를 들이는 일까지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1인 가구의 냉장고란 여러모로 쓸쓸한 법이다. 적게 사니 비싸고, 그렇다고 가격 차이가 얼마 안나는 저 양 많은 채소들을 볼 때마다 손이 커졌다. 채소는 손질하여 냉동해둬야 하고, 냉동으로 해두면 곧잘 잊히기 마련이다. 일명 냉장고 파먹기를 하다가 발견되는 식재료들은 예의 신선함은 없고 존재한다는 기능으로만 재료가 되었다.
통곡파스타 면이 딱 1인분 만큼 남았다. 푹푹 찌는 더위에 점심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레토르트 삼계탕을 데워 먹었다. 저녁에는 짭쪼름한 엔초비 오일 파스타가 제격이라 여겨지는 무더위의 정중앙 8월 초다.
통곡 파스타 면은 일반 파스타 면 보다 조금 더 끓여 익혀준다. 냄비에는 물을 끓이고, 후라이팬에는 올리브오일을 넉넉히 두어 편썰어 냉동해둔 마늘을 한줌 흩트린다. 물이 끓으면 면을 넣고 10분 타이머를 맞춘다. 냄비가 파스타 면보다 지름이 좁아 면 끝을 끓는 물에 세웠다. 익어서 부드러워질 때까지 손바닥으로 눌렀다. 면이 휘어져 냄비에 담길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올해는 에어컨을 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우선 이사한 이 집은 1년 살다 나갈 예정이라 위생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에어컨을 가동하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부쩍 오르고 있는 전기세가 걱정되었다. 그러고 서있는 내내 땀이 흘렀다. 선풍기를 틀어도 불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나는 밥을 해먹어야지. 나를 맛있게 먹여야지.
면이 냄비 안에 다 담기고, 물에 소금도 뿌렸다. 8분 남짓 끓는 시간 동안에는 엔초비를 다졌다. 엔초비 세덩이를 꺼내 도마에서 칼로 다졌다. 후라이팬에 두었던 마늘은 상온의 열기로 얼추 녹아있었고, 후라이팬의 가스불을 켜기 전에 엔초비도 합류시켰다.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두었다가 한 4분 남았을 즘 약불로 서서히 가열했다. 재료의 향을 낼 때는 약불에 은은히 볶는 것이 좋다고 들었다.
마늘이 노릇노릇 해지고 엔초비의 짭쪼름한 감칠맛 향이 올라왔고, 타이머가 느즈막히 울렸다. 후라이팬의 불을 센불로 올렸다. 타이머를 끄고 냄비의 면을 옮겼다. 마늘과 엔초비를 올리브오일에 볶을 때 사용한 긴 나무 젓가락을 이용했다. 냄비에서 후라이팬으로 면을 다 옮기고는 그 물을 바로 버리지 않고 두었다. 면을 좀 볶다가 면수로 에멀젼을 하기 위함이다.
면에 오일이 골고루 묻을 만큼 휘휘 볶다가 나무 국자로 두번 면수를 후라이팬에 넣었다. 지글지글 끓으면서 가스레인지 주변으로 물과 기름이 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요리의 번거로움이란 이런 것들을 감수해야하는 것이다. 그러고 닦아내면 그만이지. 페페론치노 두개를 부숴서 넣었다. 면수가 졸아서 보글거리는 기색이 사라질 무렵에는 불을 끄고 면을 휘휘 돌렸다. 적절하게 마늘이 볶아졌고, 오일이 면과 잘 붙었고, 페페론치노의 스파이시한 향이 잘 어울렸다.
후라이팬에서 젓가락으로 면을 휘감아 접시에 돌돌 말아냈다. 그새 나는 얼굴을 만졌는지 턱이며 이마며 화끈했다. 페페론치노를 부수고 손을 잘 씻지 않았던 터다. 눈을 만지지 않아 다행이다.
통곡의 파스타는 까슬까슬한 식감에, 마무리로 뿌린 후추의 향과 페페론치노의 매움, 엔초비의 감칠맛과 마늘의 풍미가 좋았다. 간이 좀 셌다. 그저 알리오올리오를 만들 때처럼 소금을 넣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엔초비파스타는 소금을 덜 넣어도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접시를 다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