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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와 풍차라는 콘텐츠

콘텐츠와 커머스의 절묘한 결합

안네의 흔적

 작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 즈음, 아들과 도서관에 갔습니다. 아들도 저처럼 책을 한 번 붙들면 엉덩이가 바닥에 착 붙어 떼기 힘듭니다. 저는 책을 다 고르고, 이제 집에 갔으면 좋겠는데 이 녀석이 또 어린이 열람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거예요. 아이 참…  방해하기 미안할 만큼 몰입해 있는 걸 보고, 제가 포기합니다. 그럼 나는 무슨 책을 읽어 볼까. 북 카트 위, <안네의 일기>가 눈에 들어왔어요.  


  초등학교 때 읽은 책인데, 어른이 된 지금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그런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가볍게 읽을 생각으로 책을 들었는데, 하도 재미있어서 그 자리에서 다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제가 알고 있던 그 ‘안네’가 맞는지, 표지를 다시 확인했어요.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안네의 일기는 다가오는 정보의 양과 감성의 깊이가 달랐습니다.


  안네는 부잣집 딸이었어요. 안네의 할아버지는 은행가셨고, 아버지 오토 프랑크 역시 성공한 사업가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2년 남짓 피신해 있던 집도 아빠 사무실 위층 공간이에요. 하루 종일 뛸 수도, 자유롭게 먹을 수도, 씻을 수도 없는 가혹한 은둔 생활이지만, 다른 유대인들에 비하면 아주 좋은 은신처에서 생활한 편이라고 합니다. 읽다 보니, 안네의 집에 가보고 싶어 졌습니다. 어떤 공간이었길래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그런 게 궁금했습니다. 마침, 안네 프랑크의 집은 현장을 잘 보존해 박물관으로 쓰인다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암스테르담에 가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거예요.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보니, 안네의 집 예약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역사적인 공간이라 그런지, 일 년에 백만 명이 방문한다고 해요. 무려 두 달 전에 예약이 끝이 납니다. 온라인 예약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오프라인 티켓도 없고, 다른 프리패스도 못 찾았습니다. 다행히 총 입장권의 80%의 예약은 두 달 전에, 20%의 표는 당일 9시에 온라인으로 선착순 예약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저는 미리 예약하지 못해서, 현지에서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어요. 어제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오늘 아침에 다시 예약했습니다. 팁은 8시 55분부터 접속해,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는 거예요. 날짜가 검은색으로 변할 때, 재빨리 예약을 해야 합니다. 신용카드도 미리 꺼내 두고, 노트북, 스마트폰으로 모두 접속해 두면 원하는 시간대를 예약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인터넷을 아무리 검색을 해 봐도 성공했다는 분이 없어서 마음 졸였지만, 어쨌든 해결했습니다.


  안네 프랑크의 집으로 이동합니다. 전 세계에서 밀려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표를 예약했어도 또 줄을 서야 합니다. 책에서 보았던,  안네의 집에 실제로 들어가는 거예요. 비밀의 문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줄지어 입장하지만, 모두 다 아무 말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안 된다는 한 마음. 안네와 판 단이 데이트를 했을 옥탑 공간에, 지금은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뭇잎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저울 위에 놓고, 너는 살고, 너는 죽고… 저는 그 상황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처음 안네의 일기를 읽었을 때에는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을까 싶었습니다. 731부대를 다룬 마루타라는 소설을 읽고도 충격을 받아 한동안 정신이 멍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친구의 시할머니는 1차 세계 대전을 겪으셨는데, 평생 늘 창가에 통조림을 가득 쌓아 두셨다고 해요. 저는 그 얘기를 듣고  문만 열면 뭔가가 떨어지는 어머니 세대의 냉장고가 떠올랐어요. 전후의 폐허를 겪은 분들. 먹을 것을 쟁이고 또 쟁이는 마음 아래엔, 잊기 힘든 어떤 기억들이 고여 있겠지요. 그 세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세대를 넘어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전쟁은, 안 됩니다.


  함께 숨어 지내던 8명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안네의 아빠, 오토 프랑크. 생존 확률이 20% 못 미치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아빠가 딸의 일기를 보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지… 본인처럼 가족을 잃은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결국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아들은 한글판 안내의 일기 (무삭제 판)에 푹 빠져 읽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10대가 쓴 일기가, 전 세계로 번역이 되고, 60년 넘게 베스트셀러인 경우로는 거의 유일하다고 합니다.  안네는 만약 살아 있다면 훌륭한 작가가 되었을 것 같아요.


잔스칸스 풍차 박물관

  암스테르담 여행을 위해, 저는 72시간 동안 교통편과 뮤지엄 입장이 무료인 암스테르담 시티 카드를 샀습니다. 17세기의 풍차를 보느라, 나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미리 끊어둔 패스가 아까워 그냥 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가길 잘했어요. 뜻밖에 잔스 뮤지엄이 재미있었습니다.

(금, 토, 일요일에는 암스테르담 시티카드로 풍차 박물관까지 가는 페리를 이용할 수 있어요. 무료입니다. 암스테르담은 교통비가 비싸니 일정에 참고하세요. )


  각 풍차가 바람으로 만들어 내는 동력이, 밀가루, 쌀가루, 카카오, 염료, 나막신, 치즈 등등 브랜드의 기원이 됩니다. 하나의 풍차가 하나의 산업인 셈이에요. 박물관에서 이 풍차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시실에는 공장 컨베이어 벨트 같은 진열대에, 각 풍차가 생산했던 아이템과 로고, 생산품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어딜 가도 있는 치즈 브랜드 헨리 윌리히도 풍차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전시실에 입장하자마자 갑자기 불이 다 꺼지면서, 큰 스크린에 간판처럼 영상이 하나씩 켜집니다. 그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영상은 풍차로 대표 품목을 키워낸 가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디자인도 예쁘고, 음악도 재미있어요.

작은 뮤지컬 간은 소개 영상

  비록 ‘풍차’라는 아이템은 오래된 고루한 이미지가 있을 지라도, 이 풍차와 브랜드를 엮어 프레젠테이션하는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오감을 자극하는 멀티미디어입니다. ‘풍차’라는 하드웨어는 그대로 두고, 그 가치와 철학을 최신의 기술과 예술로 업데이트합니다. 17세기의 ‘제품’을 보관하고 기록한 것도 신기합니다. 이렇게 과거를 보존하고, 기록하고, 현재에 반영하는 일은 좋은 콘텐츠의 보고가 됩니다.  

  오로지 바람으로 동력을 삼는 공장이라, 시끄럽지 않고, 연기도 없어요. 자연 에너지를 사용하니 환경오염이 걱정되지 않아 반가웠습니다. 저는 이 정도 속도라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덜란드 사람들이 재미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유료화한다는 점이에요. 풍차 하나하나마다 입장료가 있습니다. 입장료가 없는 곳에서는 뭔가를 팔아요. 나무 신을 판다던지, 치즈를 판다던지. 시간대가 맞으면 나무 신을 만드는 공정도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고퀄의 굿즈들이 포진하고 있어 지갑을 지킬 방법이 없어요. 온라인에서는 구할 수도 없고요. 제가 고민하는 콘텐츠와 커머스의 결합.


  네덜란드는 참으로 풍부한 콘텐츠를 가졌습니다. 신분과 관계없이, 농부의 집에 가도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표현할 만큼 예술이 일상 속으로 들어온 것도 부러웠습니다. 상인들이 당연히 예술가를 지원했던 사회적 분위기. 17세기 번영을 램브란트와 베르메르,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데 많이 썼고, 그 투자가 네덜란드를 여전한 강국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처럼 역사의 부침을 많이 겪은 나라. 협동을 해야만 바다보다 낮은 땅을 지킬 수 있었던 지리적 특성상, 네덜란드 사람들은 협업이 잘 되는 편이라고 합니다.


  제가 시티카드를 잃어버리고, 길에서 엉엉 울고 있었어요. 평소에 잘 안 하는 실수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 내가 혼자 왔으면 얼마나 집중해서 보고 느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속상한 마음이 허리케인처럼 솟구쳐 올라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엉엉 울고 있는데, 슈트를 입은 멋진 아저씨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너 괜찮냐고 물어요. 낯선 곳에서의 친절에 마음이 다시 따뜻해져서, 그 말 한마디에 눈물이 그쳤습니다. 제게 네덜란드는 그렇게 기억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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