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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아의 Mémoire : 콜레라 시대의 회고, 멸균

춘천예술촌 2025년 입주 작가 평론

by jr united


박상아의 Mémoire : 콜레라 시대의 회고, 멸균 시대의 망각



그때 우리는 병들어 있었지만, 살아 있었다.


박상아의 아름다운 판화 연작과 근래에 제작된 도자들을 보며, 하나의 문장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그의 작업에는 기이할 만큼 생명의 역동이 완전히 소거되어 있다. 남아 있는 것은 아스라한 시간의 거리감과 동떨어진 공간감뿐이다. 화면을 빽빽하게 채운 이교적 도상과 종교적 상징의 세계 속에서, 인간이 점유하던 세속적 위치와 서사는 이미 오래전에 밀려나 버렸다.


누천 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한 오래된 서고의 양피지, 혹은 화산재 속에 묻혀 있던 도자기 파편 위에 좀체 해독할 수 없는 이미지와 문자들이 기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종류의 감수성도 더 이상 인간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다. 절대자를 상정한 신화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도, 곰도, 새도, 지렁이도 모두 평평하게 다루어진다. 멀리서 보면 흐릿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필요 이상으로 세밀한 필치의 이미지들은 마치 무엇인가의 ‘삽도(揷圖)’인 듯 오인되기 쉽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떠한 의미도 발화하기를 거부한 채, 오직 상상의 기표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관성적으로 도상을 해석하고 이미지를 통해 세계의 비의를 읽어내려는 시도 대신,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향한 죽음의 경배와 호화로운 제물, 그리고 존재의 멸실과 끈질긴 존속의 흔적을 파편처럼 모아 종이 위에 꾹꾹 눌러온 박상아의 『비망록(備忘錄)』 속에서 죽음의 송가(頌歌, ode)를 눈에 담는다.


한편, 춘천 작업실에서 만난 박상아와의 대화는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보편명사로서의 종교,그리고 종교적 이미지의 풍부한 기원과 양식적 분화, 자의적 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특정 시기에 서울에서 나고 자라, 대학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한 그가 자신이 속한 사회문화적 계급성이나 그로부터 비롯된 지적 이력에서 슬쩍 이탈하여, 점진적으로 탈주해 가는 바로 경로가 특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동시대 한국 미술의 경향화된 쟁점 설정으로부터 독립된 이러한 관심사가 결코 전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도자처럼 오랜 시간 한 주제를 잘게 세공하며 판화 매체의 제작 문법 안에서 자신만의 시각적 어휘를 개발해 온 노력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석양을 거스르며 도심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나는 오래전 읽었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1]과 요한 하위징가의 《중세의 가을》[2]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문명의 쇠락기에 피어오른 인간사의 감정 과잉과 질병으로 인한 시대의 멸문은 죽음 앞에서 가장 강력하게 샘솟는 불멸에의 의지와 기록에 관한 욕망을 역설적으로 낳는다. 어떤 이의 도파민을 솟구치게 하는 이야기는 오늘 저녁 뉴스에 나오는 쿠테타 소식보다 중세의 멸망과 근대의 초입과 같은 머나먼 대서사시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시각적 리서치를 위해 참고했을 법한 시기들을 잠정적으로 조사하며, 중세의 정동이 신의 질서가 무너질 때 폭발한 불안이었다면, 콜레라 시대의 감정이란 근대의 질서가 세워질 때 남은 인간의 잔열이었으리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석양이 내려앉은 강변을 거스르며 도심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나는 오래전 읽었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 요한 하위징가의 《중세의 가을》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낮에 나누었던 대화 중에 언급했던 탓이다. 문명의 쇠락기에 피어오른 인간사의 감정 과잉과 질병으로 인한 시대의 멸문은 죽음 앞에서 강렬하게 분출하는 불멸에의 의지, 그리고 기록에 대한 욕망을 역설적으로 낳는다.


어떤 이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오늘 저녁 뉴스에 흘러나오는 쿠데타 소식이 아니라, 오히려 중세의 몰락과 근대의 초입, 머나먼 곳의 대서사시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도상 연구를 비롯한 전반적 리서치를 위해 참고했을 법한 시기들을 잠정적으로 되짚으며 생각했다. 중세의 정동이 신의 질서가 무너질 때 폭발한 불안이었다면, 콜레라 시대의 감정은 근대의 질서가 세워질 때 남은 인간의 잔열이었으리라고.


밤마다 그의 꿈에 펼쳐지는 세계의 정경은 어쩌면 그 자신이 인식하는 범위보다 훨씬 더 광대하고, 웅숭깊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가족이 있는 마포와 창작의 터전인 춘천을 오가며 2025년을 살아가는 작가의 일상에는 사소한 과제들의 연속, 빈곤한 이미지의 범람, 그리고 민족이나 민속과 연결된 상투적 도상들이 끊임없이 침투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의 작업이 지향하는 ‘지금-이곳’으로부터의 광활한 엑소더스는, 일종의 선택적 현실감각이자 의도된 전복성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무겁게 드리워진 유사 종교의 작동 방식, 사물에 매겨진 상징 가치를 물신으로 경배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질서, 그리고 예술적 이미지 생산을 지휘하는 상업주의의 체계 속에서 박상아의 태도는 그것들을 직접 배격하기보다, 오히려 가볍게 ‘무화(無化)’시키는 무관심의 보법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종교적이면서도 물신적인 방식으로 화려한 재물을 생산해 내는 반영적 퍼포먼스로 읽힐 수도 있다.


하루하루를 성심으로 대하는 작업 수행이 먼 거리에서 관망될 때, 그것이 과연 어떤 종류의 의미 생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때로 작가 자신조차 그 흐릿함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행위가 불투명한 세계 속에서 그가 보고 느낀 바를 시각화해 외부로 분출하는 행위일지, 혹은 이토록 불가해한 세계를 투명하게 해독하고자 하루를 매일같이 한 땀 한 땀 새기고, 문지르고, 떠내는 행위일지 말이다.


박상아의 작업이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라 짐작하는 바에 대한 근거는 희박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지금까지의 작업이 일종의 비망록(備忘錄)이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보고 들은 것의 기록이 아니라, 상상한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메모랜덤(memorandum) 일 것이다. 오늘을 중세로, 중세를 다시 내일로 이동시키며, 그 자유로운 여정 속에서 스치듯 본 것들, 조심스레 엿본 것들, 그리고 끝내 헤쳐 나온 것들을 이미지로 부리고 변신시킨다.


그의 성전(聖殿)에 그런 것들이 알뜰살뜰 모여 산다. 이름 없는 신들의 그림자와 정령의 얼굴, 이따금씩 형체를 변형해 가는 생명체, 그리고 주인 없는 재물들이 아름답게 공존한다. 박상아가 새겨둔 뜻 모를 스펠(Spell)은 저주의 낱말이 아니라 봉인의 노래로 그것들을 감싼다. 그리하여 멸균의 시대에 기록된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 죽음은 오늘의 망각 위에서 더욱 생생하게 빛난다. 송가(頌歌)란, 본디 잊지 않기 위한 순간의 기록이자, 잊어버린 날들에 관한 기억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살아 있지만, 어쩌면 병들어 있으므로.



글 조주리 (전시 기획, 평론)



각주


[1] 1985년 스페인에서 첫 출간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서사를 통해 사랑과 죽음, 기억의 공존을 형상화함으로써, 동시대 예술에서 감정의 잔존과 시간의 서정성을 사유하게 한 문학적 원천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평론가 주석)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콜레라 시대의 사랑』(El amor en los tiempos del cólera), 송병선 옮김 (서울: 민음사, 2007)


[2]하위징가의 『중세의 가을』은 중세 말기의 문화를 단순한 쇠퇴기로 규정하지 않고, 그 속에 내재한 상징 체계와 정동의 역학을 통해 근대적 정신과 미학의 형성 과정을 탐구한 문화사 연구의 고전이다. 1919년에 저술된 이 저작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시각예술의 사유 구조—특히 감정의 역사와 상징의 정치학—를 논의하는 동시대 작가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참조점으로 작용한다. (평론가 주석)

요한 하위징가(Johan Huizinga),『중세의 가을』, 이홍우 옮김 (서울: 을유문화사, 2018)



d89c3b5a53a12.png <너의 당연한 바람과 나의 사원 시리즈>, 2024, Etching & Aquatint, each 20 × 15 cm, total 10 p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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