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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22. 2021

옥색 변기 이야기  

<할머니의 사계절>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학교에 소문이 퍼졌다. 전날 내 친구가 집에 가다가 똥을 싸서 그대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저 걸어갔다는 황당한 소문이었다. 몇몇 친구들의 증언에 의해 소문은 진실로 밝혀졌고 속으로 '어떡해..' 하며 당사자에게는 열심히 모른 척해주었다. 어떻게 집에 가다가 똥을 싸는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그것도 2000년대에. 놀랍게도 내가 살았던 시골 마을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운 좋게 초등학교 바로 앞에 살았지만 다른 친구들은 학교에서 40분 정도를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있던 버스는 비교적 가구 수가 많은 삼거리 왼쪽 마을로만 갔기 때문에 오른쪽 마을에 사는 친구들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글지글 끓는 여름이나 몹시 추운 겨울이나 길고 긴 아스팔트 길을 걸을 수밖에. 옵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골 하굣길에서 갑자기 긴급한 신호가 온 내 친구. 왠지 친구의 심정을 알 것만 같다.


어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릴 때는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기만 해도 효도하는 거'라고. 시골 아이로 크면서 효도의 기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사건이 나에게도 있었다. 사랑하는 우리 집이었지만 곤란한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뒷마당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몇 살 때까지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어릴 때 집 밖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을 이용했다. 40초면 되는 거리였는데, 그곳에 가기까지는 여러 가지 마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화장실 가는 길이 늘 멀기만 했다. 마당을 빙 돌아 작은 돌계단 두 개를 오르고 좁은 돌담 틈을 통과하면 뒷마당에 우뚝 선 화장실이 보인다. 화장실의 잠금장치가 부실한 것보다 내 발 밑의 컴컴한 직사각형이 더 끔찍했다. 더운 계절에는 벌레를 무시하는 연습을 해야 했고 어두운 밤에는 거대한 파란색 손전등을 챙겨야 했다.


결국 두려움이 본능을 이겨버린 날이 찾아왔다. 뒷마당 화장실에 가기 싫어 참고 참았더니 아무 느낌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음날 견딜  없는 복통에 시달려 할머니와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 난생처음 관장을 하는 굴욕적인 날이었다. 다행히 그날 일은 할머니와 나의 비밀로 남았다. 금세 평온을 되찾은 손녀와 달리 할머니는 적잖이 충격을 받으셨던  같다.  흔한 감기도  걸리지 않고, 소화 기능도 좋아 체한  한번 없던 손녀가 병원행이라니. 그것도 화장실 때문이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에는 최신식의 '옥색 변기'가 들어왔다. 수압도 좋은 옥색 변기의 물 내림 레버를 누르며 얼마나 상쾌했는지 모른다.

가끔씩 시골집에 가면 할머니는 왜 변기를 흰색이 아닌 옥색으로 했을까 궁금했다. 알고 보니 90년대 가장 유행했던 인테리어가 옥색 인테리어라고 한다. 할머니 집의 현대화를 이끈 장본인으로서 옥색 변기를 볼 때마다 즐거운 추억에 잠긴다. '그래도 이 집에서 가장 모던한 게 저 옥색 변기다' 하며 우습고 정겨운 기억들을 비밀스레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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