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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Jun 08. 2017

3.3.2. 가족, 후원자 또는 상사

3.3. 가족

직장을 떠나 진로가 불안정한 시기에 가족은 믿고 위로하며 조언하는 후원자가 되기도 하지만 명확한 계획과 성과를 요구하며 압박하는 상사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족이 조속한 결과를 기대하거나 진로의 대안으로 임신을 재촉하는 경우, 진로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심해질 수 있고 이는 갈등과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 가족과 가족으로 살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합리화하고 자신의 선택들을 증명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Portland Japanese Garden 내 Sand and Stone Garden. 자갈 위에 놓인 돌들은 파동으로 연결되어 멈춰있지만 멈춰있지 않은 그림을 만든다.

가족의 두 얼굴


일을 쉬는 기간이 원래의 바람대로 자신을 재충전하는 시간이 되려면 본인의 의지 외에 배우자, 부모 등 가까운 가족의 인정과 격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진로가 불안정한 시기에 가족, 특히 부모들은 불안한 ‘미국 유학생 와이프’를 위로하기도 했지만 불안한 ‘미국 유학생 와이프’보다 더 불안하기도 했다. 


안정된 궤도를 벗어나는 일 자체가 부모들에게 걱정이 될 수 있다. 회사를 1년 휴직하겠다는 소연 씨의 결심은 처음에 부모님에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엄마가 왜 가냐는 얘기를 하시긴 하시더라고요. 네가 뚜렷하게 뭘 한다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며 처음에는 반대를 하셨는데, 네가 나가서 뭔가 해오지 않겠느냐 생각을 한다. 가서 놀지만 말고 뭐라도 해오라고 엄마가 하시더라고요.” 미국에 와서 다시 학교에 들어가기까지 ‘미국 유학생 와이프’로 2년의 시간을 보냈던 지현 씨는 자신의 진로가 불확실한 동안 엄마의 부담이 자신을 더 힘들게 했다고 말했다. “저희 엄마는, 정말 사랑하는데, 엄청난 부담감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제가 공부할 계획이 있는 걸 아시는데 제가 TOEFL 점수도 없이 와서 공부하는 걸 아니까 답답하시죠. 바로 점수가 나올 줄 알았는데 답답하시잖아요. 빨리빨리 네가 뭘 해야지, 시간은 가고 언제 할래, 애는 언제 나을 거냐, 이런 압박을 많이 주셨죠.” 그동안 자랑스러웠던 딸의 미래가 어느 날 갑자기 불확실해졌을 때 부모들은 누구보다도 걱정스럽고 불안해했다.


하지만 진로보다 일상에 관심을 갖고 쉬는 시간을 격려하는 부모들도 있었다. 성격의 차이라기보다, 일을 중단한 딸이 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분명한 계획 안에서 살고 있는지 여부가 차이를 만들었다. 자신들의 딸이 미래가 불확실한 ‘미국 유학생 와이프’가 아니라 ‘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쉬고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대화의 중심은 딸의 미래가 아닌 현재였다. 육아휴직 중인 미소씨는 부모님과 일에 대해 얘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부모님 입장에서 일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고, 일 얘기는 별로 안 해요. 거의 제가 매일 징징거리거든요. 첫째가 이랬어, 둘째가 이랬어, 내가 또 혼냈어. 육아에 대해 주로 얘기해요.” 수정 씨의 부모님도 수정 씨의 휴식을 격려했다. “엄마랑 아빠도 제가 회사 다닐 때 힘들어하는 걸 보셔서, 인생 한번 사는데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며 살 이유가 뭐가 있냐. 그래서 제가 수의사 시험 준비하는 것도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하라고 하세요.” 


가족과 가족계획


20대 후반~30대 중반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은 진로에 대한 부담과 함께 임신에 대한 부담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진로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임신과 육아의 삶을 시작했다가 다시 자신의 길로 돌아오기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민과 계산을 거듭했다. 부모들과 시부모들 역시 각자의 관점에서 이 시간에 영향을 끼치고 싶어 했다. 불확실한 진로의 대안으로 임신을 재촉하기도 했지만,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의 진로에 대한 기대는 각각이 달랐다. 그래서 첫째에 이어 둘째를 임신한 딸에게 “이번에도 (진학 준비는) 글렀네”라고 얘기했다는 부모도 있었고, 새로운 진로를 고심하며 근심하는 며느리에게 전화할 때마다 “아기는 언제 만들어줄 거야?”라고 묻는 시부모도 있었다. ‘미국 유학생’ 아들의  졸업 후 진로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유학생 와이프’ 며느리가 석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어떤 언급도 격려도 하지 않는 시부모도 있었다. 가장 불안한 시기에 가장 친절한 사람도 가장 불친절한 사람도 모두 가족이었다. 그리고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은 그 사이에서 고군분투했다. 


가족이자 나로 사는 시간


부모의 걱정과 기대가 부담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부모님과 거리를 두기도 했다. 지현 씨는 자신의 진로가 불안정한 시기에 부모님과의 대화가 어려웠다. “그때는 얘기를 많이 안 했어요. 제가 연락드리기가 그렇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기 싫었어요. 가끔 전화하면 밝게, 너무 좋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죠.” 혜원 씨는 자신의 진로가 확실해지기 전에 계획 수준의 생각을 공개하는 것이 편치 않았다. “제가 다시 공부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드린 적이 없어요. 그냥 혼자 정말 몰래 준비했어요. 제가 사실 다시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고 약간의 희망이었거든요. 그런데 누가 옆에서 어려울 것 같다, 왜 하냐, 그러면 이게 꺼져거릴까봐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남편 말고. 그냥 엄마한테는 영어공부하고 있다, 그 정도.” 


그리고 부모의 불안과 걱정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하고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지현 씨는 진학을 위한 영어시험을 준비하며 엄마의 재촉이 계속될 때 상황을 바꿔보기로 했다. "일단은 포기하자, 내가 너무 힘들다. 그때는 엄마한테도 얘기했죠. 엄마, 혼자 해보니까 너무 힘들어서 잠깐 조금 미국 생활 즐기고 친구도 사귀고 공부하다가 TOEFL 점수 다시 해가지고 해야 되겠다. 그때 엄마랑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엄마는 미국 오면 바로 제가 합격할 줄 알았는데, 그게 제일 부담이었죠. 엄마한테 툭 터놓고 얘기했죠. 사실 토플 점수를 받기 전까지 6개월은 이게 뭔가,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엄마는 언제 합격하냐 (재촉하시고). 그다음부터는 엄마랑 조금 편해졌어요. 하지만 그때 반년은 정말 지옥 같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가족은 '미국 유학생 와이프'에게 후원자이기도 했고 때로 상사 같기도 했다. 그런 가족과 가족으로 살며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이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독립적이고 자신을 믿는 시간이어야 했다. 정신과 전문의 이승민 선생은 그의 책 <자기합리화의 힘>에서 말한다. “나의 삶은 내가 내린 결정들로 정의된다. 과거에 해온 결정들과 앞으로 해야 할 결정들. 번복할 수 없다면 그 결정들을 계속 합리화해 나가며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지워 나가야 한다. 인생은 한 번 사는 것이다. 후회 속에서 살 것인지 뻔뻔하고 당당하게 살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문제다.” 그리고 조언한다. "적극적인 합리화"로 내가 한 선택들을 계속 증명해 나가라고.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목차 및 이전 글 보기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소개
1. 배경

    1.1. 우리 안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

    1.2. 기대와 다른 현실

    1.3.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2.1. 새로운 진로를 찾는 거대한 고민

    2.2. 현재 직장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고민과 저울질

    2.3. 나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격동기

    2.4. 정해진 계획 안에서 살며 여유를 즐기는 시간

    2.5. 육아에 집중하며 향후 진로의 방향성 고민
3.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서 찾은 인사이트

    3.1. 준비와 실행

        3.1.1.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결심

        3.1.2. 좋은 하루를 위한 노력

    3.2. 진로

        3.2.1. 진로 재설정         

        3.2.2. 진로에 대한 불안

        3.2.3. 해외에서의 신분, 면허, 언어의 제한

        3.2.4. 비우고 채우는 시간

    3.3. 가족

        3.3.1. 부부, 동반자 혹은 희생자

        3.3.2. 가족, 후원자 또는 상사

    3.4. 주위 사람들
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


월요일, 목요일마다 업로드 예정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인터뷰 참가자들의 이름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대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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