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반년, 중미에서 한 달, 한국에서 반년.
생계형 직장인이 1년간 놀면서 되찾은 삶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죠.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그녀가 살던 시대로부터 백 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녀의 주장은 여전히 제게 유효하게 다가옵니다. 남녀를 떠나, 꼭 글을 쓸 목적이 아니어도, 그저 한 명의 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 그것은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방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아닐까요.
우리 가족은 엄마, 아빠, 언니 둘 그리고 저까지 다섯입니다. 방이 다섯 개가 아니고서야 1인 1방은 불가능했죠. 저는 외향적인 언니들과 달리 혼자 있어야만 비로소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인지라 직장인 5년 차에 목돈이라 부를만한 약간의 돈이 모이자마자 바로 독립을 했습니다.
옥상을 독차지한 아담한 원룸. 이곳에 있는 물건은 젓가락부터 그릇, 화분, 쓰레기통, TV, 침대까지 하나하나 제 취향의 집합소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생활습관과 세월이 더해지자 어느새 내 집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되었지요. 집에 놀러 온 사람마다 말하곤 했습니다.
"네 집은 뭔가 너를 닮았어."
집 안에 있는 사물뿐만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온 햇살도, 살랑거리는 바람도, 옥상에 막 떨어진 눈송이도, 유유히 흐르는 시간까지도 이곳에선 전부 나만의 것이었습니다. 어떤 누구와도 공유할 필요 없는, 오로지 나만이 소유하고 향유하는 이런 장소,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요.
만약 저에게 의식주 중에 무엇이 가장 중하냐고 묻는다면 제 대답은 단연코 '주'입니다. 그래서 하와이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이민 가방까지 다 쌌지만 정작 지낼 곳은 정하지 않았었죠. 하루 이틀 묵을 숙소가 아니라 반년 간 생활할 집을 계약하는 거니까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만 보고 섣불리 정하기보단 발품을 팔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선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와이에 도착한 후 한인 게스트하우스에 2주간 묵으면서 본격적으로 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와이에서의 집 찾기란 서울만큼이나 쉽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하와이에서 살기 위한 전체적인 노하우는 구글 검색 '하와이의 실체'를 통해 큰 도움을 받았고, 집은 하와이 한인 다음카페 '하와이사랑'을 통해 구했습니다.) 겨우 조건에 맞는 괜찮은 집을 찾아 며칠 뒤 전화하면 주인이 마음을 바꿔서 집을 세 놓지 않거나 갑자기 처음 제시한 가격보다 더 올리려고 흥정하거나 하는 일을 겪고 나니 완전히 녹다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십여 군데를 넘게 돌아다닌 끝에 계약한 첫 번째 집은 침대맡 창문을 열면 알라모아나 비치가 펼쳐지는 집이었습니다. 금요일 밤이면 창문 사이로 불꽃놀이가 보이고, 밤에는 아파트 수영장에서 별을 보며 수영을 할 수 있었던 꿈같은 곳이었지요.
첫 번째 집. 창 밖으로 보이는 알라모아나 비치
그다음에 이사했던 집은 와이키키 랜드마크라는 이름을 위풍당당하게 내건 집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고스란히 떠오르네요. 피부에 닿는 느낌이 참 기분 좋았던 침대 커버의 촉감, 아침마다 잠든 눈가에 내려앉던 햇살, 그 햇살에 눈을 떠 가장 먼저 마주했던 대자연의 하늘, 거실 창문에서 몇 번이나 만났던 쌍무지개, 무지개와 생성과 소멸을 가만히 응시하던 시간, TV 대신 창문 너머 공원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을 보며 먹었던 저녁 식사, 내 방으로부터 위로와 에너지와 행복을 선물 받았던 나날들.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서 거의 혼자 독차지하던 와이키키 랜드마크 수영장
서울 집 현관에 붙였던 포스터를 떼서 하와이집 방문에 붙였다
하와이에는 꼭 가봐야 할 명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와이에서 오직 나만이 아는, 오직 나만을 위한 명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나만의 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