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엄마 밍글라바!
드디어 나의 세 번째 외국살이가 시작되었어. 첫 번째는 호주, 두 번째는 유럽, 그리고 이번엔 여기,
동남아 중에서도 최빈국에 속한다는 미얀마. 분명 나에겐 바다 건너 사는 사주는 없다 했는데 어쩜 이리 대륙도 각각 다른 곳에 살아볼 기회가 생기는지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야. 삼십여 년을 넘게 살면서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열 번을 될까 말까 한 이렇게도 생경한 나라에서 살게 되다니.
엄마에겐 버마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나라지? 그 이름에 함께 먼저 떠오르는 건 테러, 마약 등 안 좋은 단어들 뿐일 테고. 내가 이곳에 오기 전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그리는 미얀마도 개도국의 이미지만 가득할 거라 생각해. 그래도 막상 와보니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더라고. 걱정은 좀 덜해도 될 같아. 그럼 또 소식 전할게!
외국에서 산다는 건 나에게 늘 상상 속 행복한 꿈이자 목표였다. 아주 어릴 적 아빠가 일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사다 주시는 전동 연필 깎기, 색볼펜 등
새로운 학용품들이 너무 신기해 다음번엔 나도 일본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다. 태어나 수도권을 벗어나본 기억조차 거의 없는 나에게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존재는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였다. 매일 지구본을 돌리며 온 세계를 구경하는 것이 취미였을 정도로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 컸다. 당시 소말리아 기아 아동 성금 모금이라 해서 식빵 모양의 저금통에 동전 모으기나 아프리카에 헌 옷 보내기가 한창이었는데 나라와 대륙의 차이가 이해가 안 되어 항상 오빠에게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옆 나라냐는 질문을 몇 번이고 했더랬다. 다른 나라, 다른 대륙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했지만 아쉽게도 직접 가 볼 수 있을 정도로 집안 사정이 넉넉하진 못했다.
집에서 지원이 안 된다면 남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가보리라 하고 고등학교 땐 어느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해외 학교 파견 장학생 프로그램을 스스로 찾아 지원을 했다. 영국의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신문사에서 학비를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엄마를 조르고 졸라 신문사에 선발 시험을 보러 갔고 당당히 지원 조건에 합격을 했지만 학비 외에도 개인적으로 필요한 비용이 천만 원 이상은 되었다. 당시 우리 집 사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큰 비용이었다. 그렇게 나는 해외에서 살아볼 수 있는 첫 기회를 경제적 이유 때문에 놓치고 말았고 그때의 일이 두고두고 큰 한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한은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차곡차곡 모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인이 되고 스스로 돈을 버니 해외에 나가볼 수 있는 기회는 무궁무진했다. 학교 동아리에서 진행하는 해외 탐방 프로그램에 지원해 싱가포르를 가보기도 했고 캄보디아에 해외 봉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가게 된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를 우물 밖으로 탈출시켜 준 내 인생의 변환점이기도 했다. 큰 세상을 경험해 보며 좀 더 일찍 이런 걸 보고 자랐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의 길을 가고 있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늘 했기에 훗날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내 아이에게는 일찍부터 세상은 넓고도 크다는 걸 알게 해 주고 싶었다. 아기와 세계일주가 내 인생의 목표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남편이 미얀마라는 나라로 발령이 최종 결정 났을 때, 아기가 아직 어리고 최빈국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긴 하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쩌면 앞으로 더 잘 될지도 모르는 내 공방 사업을 정리하고 남편을 따라와 미얀마의 중심지 양곤에서 전업주부의 삶을 살게 됐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왔던 삶을 뒤로한 채 새롭게 맞이하는 이곳에서의 삶은 과연 어떨까.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이제는 적응이 좀 된 듯 하지만 여전히 늘 새롭고 낯선 곳이다.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건 아무래도 길거리의 개들이다. 동물 포비아인으로서 오기 전부터 길개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 마음 단단히 먹고 왔음에도 직접 보니 두려움이 두 배다. 우리나라 길고양이처럼 길멍이(?)들이 참 많은데 크기도 어찌나 큰지우리 아기만 한 큰 개들이 대부분이다. 개들이 사납게 굴지 않고 온순히 앉아만 있긴 하지만 걸어가는데 개가 앉아있기라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90% 이상이 불교신자라는 이 나라에서는 살생을 하지 않는다 하여 모기도 안 죽이고 휙휙 날린다는데 그래서 길개들도 많은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본 미얀마인들은 모기가 보이면 가차 없이 잡아버렸지만 말이다.)
정기적으로 정전이 되는 것도 흥미로운 일상이다. 다른 도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곳 양곤은 아침 9시, 오후 1시와 5시에 정전이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제너레이터가 있어 정전이 되면 대체 전기를 돌려 바로 전기가 들어오긴 하지만 없는 곳은 하루 몇 시간씩 정전인 상태로 있는다 한다. 어릴 적 갑자기 정전이 되면 급하게 촛불을 찾아 불을 켜놓고 오빠와 그림자놀이를 했던 추억 아닌 추억이 문득 떠오르면서 새삼 전기 공급이 원활한 선진국에 살았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전기가 끊기면 이 더운 나라에서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안 돼, 밥도 못 해, 일상이 해결되지 않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재미있었던 사실을 몇 가지 더 적자면 미얀마에 온 뒤로 마주치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과 아이들이 얼굴에 진흙 같은 걸 바른 채로 다닌다는 것이다. 요즘 골프장 갈 때 여자들이 하나씩 꼭 붙인다는 자외선 차단 패치가 여기선 일상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뭘 바른 흔적이다. '타나카'라고 하는 나무에서 나온 물질이 천연 선크림 역할을 해서 그걸 화장품처럼 바르고 다닌다고 한다. 로션 바르듯 문질러 바르는 게 아니라 약간 묻히듯 발라야 효과가 있는 건지 이마와 볼에 '나 크림 발랐소' 하고 다니는데 마치 요즘 MZ들이 앞머리에 헤어롤 말고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런가 하면 남녀불문하고 론지라고 하는 형형색색 각종 문양의 전통 의상을 정말 많이 입고 다닌다. 긴 롱스커트 스타일로 처음엔 이 론지가 굉장히 캐주얼한 복장이라 생각해 뭐 저렇게 편하게들 입고 다니나 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나라 한복과 같은 전통 의상이었다. 그래서 특별한 날엔 비싸고 좋은 옷감의 론지를 격식 차려입기도 한단다.
오자마자 물갈이를 하느라 배탈이 자주 나 고생을 했는데 배탈 횟수도 점차 줄어드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보다. 이런 낯설음들이 점점 익숙해져 완전한 일상이 되어버렸을 때를 상상하며 오늘도 이곳에 서서히 스며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