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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번 지나친 소화기

"여보~~~~~!! 여보~~~~!! 빨리 나와 봐~~~~!!“


아내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재에서 줌(zoom)으로 영상회의 중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아내가 방문을 열고 나오라고 소리친다. 거실로 나가보니 천장에 설치된 형광등 부근에 불이 붙었다. 그렇게 큰 불이 아니어서 어떻게 해서라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가 부엌에서 가정용 소화기를 들고 나온다. 스프레이 타입의 소화기 머리를 눌러보았지만 작동이 되지 않는다. 돋보기안경을 쓰지 않고 있어서 사용법을 바로 알 수 없었다. 서재에서 안경을 가지고 나와서야 안전핀을 뽑고 소화기를 불꽃을 향해 발사했다. 345ml의 용량을 모두 소진했지만 불꽃은 오히려 커졌다. 당장이라도 천장을 뚫고 불이 번질 기세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온다. 


아내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하고 나도 목욕탕에 가서 물을 받아왔다. 물을 한 차례 부었지만 불길은 여전하다. 검은 연기가 거실을 순식간에 뒤덮는다. 집안이 모두 타 버리고 10층인 우리 집에서 다른 집으로 불길이 옮겨지는 광경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30초 정도만 더 해 보고 안 되면 집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두세 번 물을 끼얹은 후에 불이 꺼졌다. 그 무렵 아내의 연락을 받은 아파트 경비원이 소화기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내와 나는 순식간에 당한 재난의 공포에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경비원이 만약을 위해 소방서에 연락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미국에서 살던 시절 소방차, 구급차가 출동해서 큰 비용을 지불했던 이웃들이 생각났지만 왠지 연락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방차, 구급차 출동에 대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물을 부어 불이 꺼진 듯 했지만 연기로 뒤덮인 거실 어딘가에 불꽃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잠시 후 사이렌 소리와 함께 소방차 두 대가 도착했다. 갑옷과 투구처럼 보이는 소방복으로 무장한 소방관들이 신발을 신은 채로 집안으로 들어왔다. 거실과 현관 부근에 소방대원 10명, 경찰관 1명, 경비원 1명, 집안 여기저기의 사진을 찍는 사복 차림의 젊은 여성 1명이 들어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소방관들은 큰 소리로 서로 내용 모를 말을 주고받았다. 소방관 세 명이 화재난 부근의 온도 등을 살펴보더니 불에 타고 남은 조명 기구들을 천장에서 잘라서 내려놓았다.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을 확인하고 나와 아내의 인적사항을 적었다. 초기에 대응을 잘했다는 말과 함께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려준다. 화재의 원인은 전선, 조명기구 등의 노화로 인한 누전이라고 했다. 우리 아파트는 지어진지 30년 이상 되었다. 


소방관들이 집을 나서려고 할 때 아내는 쇼핑백에 사과 주스팩 30개 정도를 담아서 수고했으니 나눠 드시라고 했다. 그들은 이런 것 받으면 안 된다고 하며 웃으면서 손사래를 친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문밖으로 나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 놀라움에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현관문 바로 옆 벽에 소화기(용량 3kg)가 달려 있었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가 10년이 되었으니 집을 나가고 들어 올 때를 합하면 지금까지 적어도 5,000번은 그 소화기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도 내 머릿속에 이 소화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작은 전율이 온몸에 서서히 퍼졌다.


문제는 가까운 곳에 있었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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