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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실리콘밸리, 마루SF의 미션

by 골목길 경제학자

달라진 실리콘밸리, 마루SF의 미션


아산나눔재단은 11월 1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마테오에서 첫 해외 거점이자 단기 체류형 글로벌 커뮤니티 허브인 '마루SF'를 공식 개관했다. 마루SF는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초기 단계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하는 창업팀들이 실리콘밸리 생태계에 '로컬'로 진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제공한다. 개관식에 참석한 나는 이 기회에 실리콘밸리의 주요 기관과 투자사를 방문할 수 있었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밀려오는 이중적 감정이었다. 기업가정신, 기술에 대한 집착, 반문화적 기질, 벤처캐피털과 창업기업의 협업 구조는 여전했다. 실리콘밸리를 상징하는 격식 없는 캘리포니아 문화―직함을 앞세우지 않고, 비형식적 대화를 선호하며, 창의성을 우선하는 태도―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기술인을 둘러싼 생활양식과 도시의 감수성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이 변화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최근 출간된 문헌들을 바탕으로 실리콘밸리의 진화를 다시 추적해 본다.



1990년대: 이상주의와 공학 공동체

1990년대 실리콘밸리는 기술적 이상주의가 도시 전체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엔지니어들은 네트워크를 공공 기반시설로 바라보았고, 이를 구축하는 행위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했다. Margaret O'Mara가 The Code에서 묘사하듯 당시의 기술인은 실험·학습·창작이 일상인 '공학적 공동체'에 가까웠다.


벤처캐피털은 기술의 깊이와 해결해야 할 문제의 본질을 기준으로 평가했다. 단기 수익보다 기술적 비전과 연구개발 능력을 우선했고, Sequoia Capital, Kleiner Perkins 같은 전통적 VC들은 파트너의 기술 판단력과 장기적 관점을 중시했다.


이 시기 벤처캐피털의 지리적 중심지는 Palo Alto와 Menlo Park, 특히 Sand Hill Road였다. 1972년 Kleiner Perkins가 이곳에 첫 사무실을 열면서 형성된 클러스터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벤처캐피털 집적지"가 되었다. Stanford 인근의 Palo Alto, Mountain View, Menlo Park가 명실상부한 실리콘밸리의 중심이었다.


아시아 출신 기술 인력의 유입도 꾸준했지만, 이들은 아직 산업의 기반을 조용히 떠받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2010년대: 플랫폼과 소비 중심 기술문화

2010년대에 실리콘밸리는 소비 중심 도시로 변모했다. 스마트폰과 플랫폼의 확장은 기술산업의 무게중심을 기초기술에서 사용자 경험으로 이동시켰고, Uber, Airbnb, Instagram, Snap 같은 서비스가 이 시대를 대표했다. 기술인의 생활은 효율성과 편의성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Olivier Alexandre가 Tech에서 분석하듯 플랫폼은 이동·여가·감정의 흐름까지 조직하는 새로운 사회적 장치가 되었다. 이 시기 벤처캐피털은 사용자 수, 성장 속도, 즉각적 지표 중심의 투자를 선호했다. SoftBank Vision Fund 같은 메가펀드가 등장하며 투자 규모는 커졌지만, 기술적 깊이에 대한 판단보다는 시장 점유율 경쟁에 집중했다. 그 결과 기술인은 실험보다 시장 반응을 우선하게 되었고, 도시에는 물질적 감수성과 실용주의적 태도가 확산되었다.


이 시기 지리적 변화도 뚜렷했다. 젊은 창업자들이 선호하는 도시 생활양식과 소비자 앱 중심 스타트업의 증가로 벤처투자의 중심이 San Francisco로 이동했다. Twitter, Square, Pinterest 등이 Mid-Market 지역에 본사를 두면서 "실리콘밸리"의 개념은 Santa Clara Valley를 넘어 San Francisco까지 확장되었다. 반면 하드웨어와 엔터프라이즈 기술 스타트업은 여전히 Palo Alto와 Mountain View에 집중됐다.


Alexander Karp가 The Technological Republic에서 개탄한 "기술의 본질적 깊이 상실"은 바로 이 시기의 현상이었다.


2020년대: 전략기술과 심층기술 생태계의 귀환

2020년대의 실리콘밸리는 다시 전환점에 서 있다. 인공지능, 반도체, 로봇공학, 양자기술 같은 전략 분야가 중심이 되면서 기술인의 생활양식은 다시 연구와 실험 중심으로 돌아갔다. ChatGPT의 등장 이후 AI 전환은 실리콘밸리의 모든 논의를 지배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벤처캐피털 문화다. 심층기술 기업이 다시 주목받으며 투자 기준은 단기 지표에서 기술 난이도·연구개발 역량·전략적 중요성으로 이동했다. 대규모 AI 모델 개발에는 수억~수십억 달러가 필요하고, 투자자들은 다시 기술적 깊이를 평가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했다.



더 나아가 투자와 인큐베이팅을 통합한 새로운 유형의 벤처캐피털이 등장했다. 이번 방문에서 만난 Hustle Fund(2017)는 초기 소액 투자 후 창업자의 실행력을 모니터링하여 추가 투자를 결정하며, 2000명 이상의 개인 투자자를 교육하는 "Angel Squad"와 판매 교육을 제공하는 "Redwood School"을 운영한다. HF0(2023)는 반복 창업자를 위한 12주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샌프란시스코 저택에서 공동 생활하는 "해커 수도원" 모델로 최대 $1M을 투자한다. IndieBio(2014)는 세계 최초 합성생물학 전문 액셀러레이터로 $525K 투자와 함께 BSL1/BSL2 실험실을 제공한다. 이들은 단순히 자금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인재 채용, 기술 자문, 실험실 인프라, 생활 지원까지 직접 제공한다. 2010년대 플랫폼 시대에 약화되었던 장기투자 정신과 기술 판단 능력이 부활했을 뿐 아니라, VC의 역할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코워킹 공간도 진화했다. 2020년 Ferry Building에 설립된 Shack15는 단순한 공간 제공을 넘어 회원제 커뮤니티($2,000/년), VC 펀드, 팟캐스트, 이벤트를 통합한 모델을 구축했다. 추천제로 운영되는 이 공간은 스스로를 "실리콘밸리의 입구"로 정의하며, AI와 딥테크 중심의 네트워킹 허브가 되었다. 코워킹 공간이 투자 신디케이트와 결합하면서, 물리적 공간 자체가 벤처 생태계의 일부가 된 것이다.


지리적으로는 Burlingame 북부를 중심으로 한 양축 구조가 확립되었다. AI를 포함한 기술 집약적 스타트업과 VC들은 San Francisco와 Palo Alto/Mountain View 사이를 선호한다. 흥미로운 것은 Burlingame 이남, 특히 Santa Clara나 San Jose는 "중심에서 너무 멀다(too far south)"는 인식이 확고해졌다는 점이다. 많은 VC들이 San Francisco에 주 사무실을 두고 Palo Alto에 제2 사무실을 운영하며, Caltrain으로 양 지역을 오가는 통근 패턴이 정착되었다.


동시에 인력 확충 경쟁과 고액 연봉 구조로 일부 기술인들은 고가 장비·부동산·개인브랜딩 등 새로운 형태의 과시적 소비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아시아 출신 엔지니어는 이제 실리콘밸리 기술 생태계의 핵심축으로 자리 잡으며 도시의 기술집약적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기술·자본·생활양식이 동시에 재편되는 2020년대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성격을 보여준다.


서울·뉴욕, 그리고 실리콘밸리

실리콘밸리는 이처럼 이상주의-소비중심-전략기술 중심이라는 독특한 순환을 거치며 문화·기술·자본이 함께 변모해 왔다. 반면 서울은 모바일과 콘텐츠 중심 생태계를 유지했고, 뉴욕은 금융·미디어 기반 혁신이 강하다. 두 도시는 1990년대 실리콘밸리식 이상주의도, 2020년대 전략기술 중심 생태계도 온전히 구현하지 못했다.


실리콘밸리의 변화는 이곳 진출을 고려하는 한국 스타트업에 분명한 교훈을 남긴다. 지금의 실리콘밸리는 소비자 편의 중심 서비스로 성공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이 도시는 기술적 깊이, 연구개발 지속성, 세계 수준의 엔지니어링 역량, 전략기술을 통한 구조적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기업만을 원한다. 단기 성과 중심 방식으로는 이곳에서 자리 잡기 어렵다. 기술의 본질을 파고드는 기업만이 실리콘밸리에서 살아남고 성장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 스타트업이 이러한 실리콘밸리에 어떻게 진입하느냐다. 기술적 역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투자자·엔지니어·창업자로 구성된 긴밀한 네트워크, 실험실 인프라와 멘토링을 제공하는 새로운 VC 모델, 코워킹 공간을 통한 커뮤니티 형성―이 모든 것이 물리적으로 그곳에 존재해야만 작동한다.


바로 이 시점에 개관한 마루SF는 시의적절한 인프라다. 실리콘밸리가 다시 전략기술과 심층기술 중심으로 재편되는 지금, 한국 스타트업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사무실 공간이 아니라 이 생태계에 '로컬'로 진입할 수 있는 실질적 교두보다. 마루SF는 주거와 커뮤니티를 결합한 단기 체류형 허브로, 초기 단계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하는 창업팀들이 Burlingame 북부의 핵심 지역에서 실리콘밸리 네트워크에 직접 접속할 수 있게 한다. 2010년대 플랫폼 시대가 아닌, 2020년대 AI와 딥테크 시대의 실리콘밸리에 진입하려는 한국 스타트업에게, 마루SF는 기술적 깊이를 인정받고 장기적 관점의 투자자를 만날 수 있는 물리적·문화적 기반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Alexandre, Olivier. Tech: When Silicon Valley Remakes the World.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25.

Karp, Alexander C., and Nicholas W. Zamiska. The Technological Republic: Hard Power, Soft Belief, and the Future of the West. New York: Crown Currency, 2025.

O'Mara, Margaret. The Code: Silicon Valley and the Remaking of America. New York: Penguin Press, 2019.

Smith, Justin E. H. The Internet Is Not What You Think It Is: A History, a Philosophy, a Warning.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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