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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테일 코어: 골목상권이 넘어야 할 새로운 기준

by 골목길 경제학자

리테일 코어: 골목상권이 넘어야 할 새로운 기준


팬데믹이 드러낸 진짜 문제

팬데믹 이후 골목상권의 위기를 온라인 쇼핑 증가나 배달앱 확산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소비자의 취향이 고급화되면서, 골목상권이 의존해 온 핵심 경쟁력이 무너졌다.


과거에는 낡은 건물의 정취, 개성 있는 인테리어, 창업자의 실험적 시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소비자는 더 높은 완성도와 세련된 경험을 기대한다. 골목의 감성만으로는 사람을 끌어들이기 어려워졌다.


Z세대가 원하는 것

팬데믹 시기에 소비 주체로 부상한 Z세대는 이전 세대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공간, 고급스러운 디자인, 프리미엄 경험을 선호한다. 오마카세, 하이엔드 디저트, 프리미엄 스테이 같은 고급 경험이 일상의 기준이 되었다.


반면 게스트하우스나 도미토리형 숙박은 매력을 잃었다. '소소한 감성'에 의존한 공간, 중저가 감성의 골목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골목이 제공하던 감성적 가치는 더 이상 선택 기준이 되지 못한다.


백화점이 골목을 모방하다

더 큰 변화는 대형 리테일에서 일어났다. '더현대 서울' 같은 백화점들이 골목상권의 강점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로컬 브랜드 팝업, 독립 디자이너 감성, 실내 골목길과 광장 같은 공간 연출, 전시와 체험 중심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는 '골목 같은 백화점'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 백화점은 골목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았다. 골목상권의 차별성이 사라진 결정적 순간이었다.


기존 모델의 한계

이런 변화들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하다. 팬데믹 이전의 골목상권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개성 있는 가게 몇 곳이 자연스럽게 모이면 상권이 형성되었고, 오래된 건물과 골목 분위기가 핵심 경쟁력이었다. 점포들이 분산적으로 배치되어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다르다. 소비자 기준이 상향되었고, 대형 리테일이 감성 경쟁에 참여했다. 개별 점포의 노력만으로는 상권을 활성화할 수 없게 되었고, 분산형 구조는 경쟁력을 상실했다.


리테일 코어: 새로운 전략

이 상황에서 등장한 개념이 '리테일 코어'다. 여기서 말하는 리테일 코어는 부동산 업계에서 통용되는 일반적 의미, 즉 쇼핑몰의 핵심 상업구역이나 앵커 테넌트를 지칭하는 용어와는 다르다. 이 글에서 리테일 코어는 골목상권이라는 열린 도시 구조 안에서, 직주락 기능이 통합된 설계된 중심부를 의미한다. 상권의 중심부를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접근이다.


리테일 코어는 상권의 중심에 콘텐츠와 경험을 집중시키고, 그 주변으로 자연스러운 동선과 체류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개별 점포를 개선하는 대신, 상권 전체를 하나의 생태계로 재구성한다.


여기서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리테일 코어는 대기업이 주도하는 복합개발이 아니다.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처럼 하나의 법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폐쇄적 공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리테일 코어는 기존 골목상권의 구조 안에서, 여러 주체가 참여하는 열린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설계의 완성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리테일 코어가 도로 확장이나 주차장 증설 같은 기반시설 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리테일 코어의 핵심은 건축과 디자인 그 자체가 콘텐츠가 되는 것이다. 건축물은 단순히 가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사람들이 경험하고 싶어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 체류를 유도하고 동선을 만들어내는 전략적 도구다.


리테일 코어의 설계 원칙은 '작은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직주락, 즉 일하고(職), 살고(住), 즐기는(樂) 기능이 한 공간에서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 리테일 코어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일하는 공간으로서의 코워킹, 머무르는 공간으로서의 스테이, 그리고 일상을 지원하는 기본 리테일이다. 이 세 요소가 건축적으로 통합될 때, 상권은 단순한 쇼핑 공간을 넘어 하루 종일 사람들이 체류하는 도시적 중심이 된다.


감성보다 완성도가 중요한 시대에, 상권의 경쟁력은 이 코어의 건축적 질과 기능적 완결성에 달려 있다.


실제로 나타나는 변화

현실에서 이미 그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점포들이 무작위로 모인 상권은 방문객이 감소하고 체류 시간이 짧다. 반면 명확한 중심을 가진 상권은 높은 방문객 수와 긴 체류 시간을 보여준다.


일본 마에바시의 시로이야 호텔이 대표적인 사례다. 2008년 폐업 후 철거 예정이었던 에도시대부터 이어진 노포 료칸을 6년간 개보수해 2020년 개업한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호텔 리노베이션이 아닌 도시재생의 앵커로 기획되었다. 건축가 후지모토 소스케가 설계를 맡았고, 아티스트 레안드로 에를리히, 프로덕트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 건축가 미켈레 데 루키가 참여해 '아트 데스티네이션'을 만들어냈다.


마에바시 도시재생은 '건축 주도 지역발전론'의 전형적 사례다. 세계적 건축가의 작품성이 프로젝트를 이끌었고, 건축물이 콘텐츠 그 자체가 되었다. 건축과 아트의 결합이 방문 이유가 되었고, 머무르는 경험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시로이야 호텔은 고립된 성공 사례가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JINS 본사 이전, 아츠 마에바시 미술관, 마에바시 갤러리아 등 일련의 문화 시설과 연계되어 마에바시 중심가 약 1.5km 구간에 직주락(일하고, 살고, 즐기는) 기능을 통합하는 리테일 코어를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군마현에서 상업지 가격이 47개 도도부현 중 최하위였던 쇠퇴 도시가, 세계적 건축가와 아티스트가 주목하는 창의도시로 전환되는 중이다. 건축이 콘텐츠가 되고, 그 콘텐츠가 상권 전체의 생태계를 바꾼 사례다.


골목상권의 미래는 흥미로운 개별 가게가 아니라, 이들을 연결하고 체류를 가능하게 하는 리테일 코어에 달려 있다. 소비자는 더 이상 우연한 발견을 기대하지 않는다. 설계된 경험을 선호한다. 도시의 소비 활동은 자연스럽게 코어 중심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

골목상권이 다시 경쟁력을 갖추려면 전략을 바꿔야 한다. 분산적 점포 지원이나 단순한 거리 환경 개선, 개별 가게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 상권의 중심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그 중심에서 어떤 경험이 발생할 것인지, 그 경험이 상권 전체로 어떻게 확산될 것인지에 집중해야 한다.


도시가 상권을 만드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리테일 코어가 도시적 경험을 만들고 상권의 흐름을 정의한다. 팬데믹 이후 골목상권의 경쟁력은 구조의 재편과 중심부의 설계 능력에 달려 있다. 미래의 상권은 코어를 통해 작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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