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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보 Jun 16. 2018

김밥 예찬론

어느 김밥마니아의 맛평론 '김밥에 대하여'

"꼭 이런데 와서 김밥 먹는 애들이 있더라."

네, 제가 바로 그런 애 입니다.

비싼 뷔페식 음식점에 가는 일이 생기면, 나는 이런 핀잔을 뒤로한채 항상 김밥을 빼놓지 않고 먹는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보통은 포만감만 커서 인기가 없고, 사람들에게 잘 팔리지 않는 메뉴이긴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음식인 김밥 맛을 보면 이 식당의 전체적 퀄리티를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어릴 적부터 나는 김밥을 좋아했다. 맛은 둘 째치고, 김밥 한 줄 안에서 여러가지를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밥이란 것은 분명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싶어하는 식탐 많은 나같은 사람에게 제 격이다. 음식 먹는 걸 그리도 좋아하면서도 오랫동안 먹는 것, 먹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쏫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는 사람에게도 좋다.(이토록 이중적인 돼지라니.)


김밥 한 줄이면 거뜬하게 한끼 식사가 가능하다. 포만감이 크다. 그리고 무얼 하든 '밥심'이지 같은 말을 내내 듣고 살았던지라, 뭔가 제대로 먹고 다니면서 살고있다는 심리적 만족감도 생기게 하는 것같다. 대학시절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편의점 김밥에 의존했었다. 시간이 없어 공강시간에 혼자 식사를 해결하거나, 시험기간에 도서관 매점에 앉아서 먹기에 눈치가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김밥을 먹기때문에 혼자 먹는 거에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물었더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쨋든 2천원 남짓(요새는 가격이 많이 오른 것 같다.)의 비용을 생각하면 탄수화물만 잔뜩 있는 빵보다야 훨씬 나은 선택이 아닌가.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땐, 이민가방에 대나무살로 만든 '김밥말이'를 챙겨갔다. 어쩌다보니 각자 음식을 해서 포트럭파티를 할 일이 종종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무슨 대단한 장비라도 챙겨오는냥 대나무 말이를 꺼내들고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돌돌만 김밥을 동그랗게 썰어내서 접시에 올려만 두어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친구들은 신기해하며 너나 할 것없이 자기도 한번 말아보겠노라며 대나무 김밥말이 앞에 줄을 섰다. 8개월 정도의 기간동안 한 백여줄 정도 말았나? 유럽에 있었던 친구네 집에서 신세 질 일이 생기면, 숙소비를 내기도 뭐해서 보답 차 김밥 열줄을 잔뜩 말았다. 돌이켜보니 그때는 돈만 없던 시절이었다.  공부하기가 너무 싫을 땐, 나중에 망하면 유럽으로 이민을 와서 김밥장사를 해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의 어떤 날들.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김밥파티를 벌였었다.

얼마전 쉬는 날 동생과 함께 서울 모처의 분식집에 가서 김밥을 먹었다. 뭐 맛있는 걸 먹고 기분전환을 해볼까 머리를 굴려봤지만, 그냥 나도 동생도 김밥이 먹고 싶었다.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지만, 다른게 아니라 이것이 행복인가 싶었다. 김밥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만나서 고작 '김밥'이야? 라고 할 수 있지만. 나에게 김밥은 '고작' 김밥이 아니다. 자주보지 못해도 '김밥'먹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나 손으로 한번 세어봤다. 다섯 손가락은 너끈히 접히더라.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살면서 "김밥 한줄?" 이라는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좋겠다. 아님 어쩔 수 없고.    



덧, 개그우먼 이영자는 맛 표현을 잘해서, 업체 측에서 평생이용권도 준다는데 그런걸 바라고 쓴 건 아니지만, 김밥이 글쓰는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어떤 날 되도 않는 잡문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4월 11일/ 김밥에 대하여)


김밥처럼 자연스럽고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음식이 있을까? 먹기좋게 얇게 채썬 알록달록한 야채와, 얇게 저며 볶아낸 고기, 노란색 단무지, 포슬포슬하게 썰어낸 달걀지단을 돌돌 말아 싼 김밥은 동그란 생김새에 색깔도 알록달록해서 음식이라기 보다는 공예품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갓 지어낸 고슬한 밥알 안에 들어간 재료 면면을 살펴보면 이토록 자연적인 음식이 있나 싶다. 바다에서 건져올려 해풍으로 말려냈을 김, 땅에서 일년내내 지은 쌀알을 겉옷으로 입고,  속재료들은 논에서 밭에서 하늘을 지붕삼아 눈, 비는 물론 햇볕까지 머금은 것들이다.


생김새는 부자연스러울 지언정, 맛은 참으로 자연스럽다. 자연의 맛을 다 담아냈으니 그럴만도 하다. 김의 바다맛, 시금치와 쌀의 땅의 맛, 땅의 맛에 시큼한 식초를 더한 단무지의 맛, 운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닭이 되었을 수도 있던 달걀의 슴슴하고 포슬한 식감.(이건 조금 과한가?) 자연의 콜라보가 만들어낸 종합음식 같은 느낌이다. 여기에 더해 사람의 땀 맛도 느껴지고. 김밥은 '사람의 힘의 더해진 자연의 맛'이다. 오늘 점심 메뉴는 그래서 김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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