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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한 꺼풀 벗기면

우리가 가까워질 때 벌어지는 일들

by 양주안

대문이 없는 집이다. 예전에는 있었는데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차에서 내려 대문을 열고 닫는 일이 귀찮아 없애버렸다.

알레시아에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대문을 없애도 괜찮으냐고 묻자 그깟 대문 따위 마음먹으면 누구나 넘는다며 코웃음 쳤다. 그리고는 자기 집에는 손님이 자주 드나들어 무서울 새가 없다고 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이 집에 일곱 명이 더 있었다. 아마추어 클라이밍 대회에 나갔다가 만난 친구들이었는데 지난 며칠 동안 이 집에서 머물렀다. 돌과 쇠로 담을 짓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집 안에 들이는 일로 자기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길과 집 사이 낮은 턱을 넘으면 곧장 작은 정원과 차고다. 몇 해 전 알레시아가 활동하는 봉사단체에서 받아 온 어린 나무 두 그루가 없었더라면 정원보다는 잔디마당이라 불러야 더 어울릴 법하다. 나무 곁에는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작은 꽃들이 삐죽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일부러 심은 건 아니다. 나무에 물을 주자 어느 날 풀이 꽃으로 변해 있었다고 했다. 알레시아는 꽃이 나고부터 나무 주변 잔디는 피해서 깎는다. 혹시 꽃이 더 필까 싶어 그런다고 했다.

혼자 살기에 벅차 보일만큼 큰 집이다. 복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는 거실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세 개의 방이 있다. 창이 가장 크게 나 있는 방을 내어 주었다. 세 사람이 누워도 남을 만큼 큰 침대 옆 창문으로 작은 정원이 보인다. 알레시아는 방에서 나올 때나 잘 때 창문을 닫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종종 새들이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언젠가 친구의 귀걸이 한 짝을 가져간 일이 있다. 그는 이런저런 설명을 마친 뒤 방문을 닫아 주고는 거실로 향했다.

창문 앞에 섰다. 여행은 방이 자주 바뀌는 일이다. 새로운 거처가 생길 때마다 창밖을 보는 게 습관이 됐다. 이상하게도 방이 바뀌면 얼마동안 바깥 풍경이 더 내 것인 듯하다. 주인 없는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풍경이라서 무엇도 가질 수 없다. 그렇기에 남의 물건으로 가득 찬 낯선 방보다 약간 더 포근하다.

창밖을 보는 몇 분 동안 집 앞 길에는 손을 잡고 걷는 엄마와 아이, 퇴근하는 중년 남자, 산책하는 노인 두 명이 지나갔다. 아이는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고 있는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한 노인은 내가 목례를 하자 모자를 벗어 정중하게 답례했다. 알레시아가 대문을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담장 아래 감춰졌을 사람들이다. 전부 두려움을 한 꺼풀 벗기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낯선 것은 무섭고 두려움은 우리를 그늘 아래로 걷게 만든다. 잃을 게 많은 이들은 벽을 높이 쌓아 거리를 그림자로 덮어버린다. 유럽에서 본 성들이 그랬다. 그래서 수많은 왕이 성벽에 붙어 걷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나 보다. 적어도 여기서 내가 만난 그늘 아래 지나는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면 손을 흔들고 낯선 이의 예의 바른 인사에 정중히 모자를 벗는 이들이다. 두려움의 벽이 높다는 건 보통의 삶들이 주고받는 따스함을 느낄 수 없다는 의미다. 그건 정말이지 외로운 일이다. 이 집에 담벼락이 없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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