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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 물을 주듯

<사랑>

by 노랑자

‘사랑’이라는 이번 주제는 정말 어려운 주제다. 어려운 만큼 사랑의 정의부터 되짚어본다면, 사랑이란 ”특정 대상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감정 또는 관계를 뜻한다 “고 한다. 삶에 사랑이 의미가 있으려면 결국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나눠지려면 그에 앞서 잘 표현하는 것이 먼저라고 믿고 있다.


20대 중반에 시작한 첫 연애 이전엔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다.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을 줄만 알았고, 더구나 부모님은 살갑고 다정한 언어보다는 직설적이고 괄괄한 화법으로 나에게 사랑을 표현해 주셨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언어로 사랑을 배우며 컸다.


나는 크면서 짝사랑을 많이도 했던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했지만 우리 집에서 배운 언어로는 상대와 마음을 나눌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 쓰이는 언어는 아무래도 범용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은 애초에 내가 좋아한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짝사랑 상대들은 나의 존재도 모르고 인생의 궤도에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를 반복하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일이 되기 일쑤였다.


20대 중반에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의 나는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내 언어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알려주는 수밖에. 마음먹은 시점의 짝사랑에게 갓 태어난 송아지마냥 엉거주춤 마음을 전달해 보았으나 상대는 당황하며 도망쳤다. 갑자기 이러면 곤란하다는 식이었다. 적잖은 실의에 빠져 있던 당시, 범용적인 언어로 사랑을 다정하게 마음을 나눌 줄 모르는 부모님 탓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도 사랑과 인생과 아이를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첫 연애이자 지금의 남편이 된 세대주씨는 감사하게도 나의 기습적인 짝사랑 고백을 받아준 위인이었다. 고백 이전에도 종종 좋아하는 티를 완급조절 없이 왈칵 쏟아내곤 했지만, 나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감정을 분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를 돌 보듯 하였었나) 그런 사람이었기에 다정함을 성숙하게 표현할 줄 모르는 나를 받아 주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동전에 앞면이 있으면 뒷면도 있듯, 덤덤하고 말 수가 적은 성격의 세대주는 감정을 미세한 표정 변화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세대주의 눈두덩이와 애굣살의 부푼 정도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처음에는 원예작물을 키우는 것과 같이 아리송했다. 거친 언어로 표현하는 나와 침묵의 표정변화로 표현하는 세대주는 서로 아꼈지만 표현법이 달라 자주 어긋나곤 했었다. 어긋날 때마다 다툼을 반복하며 서로에게 전해지는 표현법들을 익혀나가게 되었다. 그것이 언어든, 의성어든, 의태어든.


사랑하는 사람 간에는 이심전심이 있다고 한다. 이제는 일일이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세대주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하지만 이심전심을 이유로 표현을 게을리해서는 사랑을 수십년 가꿔나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에 어제 알던 세대주가 오늘의 세대주가 아닐 수 있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창의적인 방법으로 세대주에게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는 편이다. 식물에 물을 주듯 좋은 양분을 담아 이 표현 저 표현 달리해가며 더 오래오래 가꿔가고 싶다.


건강한 식사도 나의 표현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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