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가 함께한 베트남 여행 중 바나힐
“ladies and gentlemen! the show will begin soon”
“신사·숙녀 여러분! 쇼가 곧 시작합니다.”
맥주광장의 스피커폰에서 재생되는 남자의 힘찬 목소리가, 코미디 연극의 배경으로 쓰일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음악과 함께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야외 분위기에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은 기분이 한껏 들떠 온몸을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며 점프도 하고 뛰기도 한다.
야외 테이블 한 곳에 자리 잡은 우리는 시원한 맥주와 핫도그, 소시지를 안주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저녁 하늘에는 좀 전에 내린 비가 선사한 아름다운 무지개가 그려졌다. “엄마 무지개야!” 꿀호가 외친다. 모두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길다랗게 펼쳐진 무지개를 넋 놓고 바라본다.
여기가 파라다이스다. 한 장의 아름다운 수채화와 같았던 그날은 부모님, 40대 우리 부부, 그리고 8살 아들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평생 남게 될 것이다. 바로 그곳은 우리들의 천국 베트남의 ‘바나힐’이었다.
2박 3일간의 호이안 여행을 마치고 바나힐로 향한다. 고급 마사지를 받으면 다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가 대중화되어 있는 베트남이기에 겸사겸사 여독을 풀고자 삼대가 모두 마사지를 받았다.
아들은 인생 첫 마사지 경험이라 90분을 잘 받을 수 있을까 염려했었는데, 걱정이 무색할 만큼 여유롭게 잘 받았다. 여행이 끝난 지금도 종종
“엄마, 마사지는 동그란 구멍에 얼굴을 데고 엎드려서, 오일을 발라 몸에 문질러야 해”
하고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바나힐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서 오늘 1박을 할 예정이다. 바나힐 유일한 숙소 머큐어 호텔 체크인을 위해 줄을 선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바나힐에서 1박을 할지 당일치기로 다녀올지 아니면 가지 말지 며칠을 고민했었다.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도 찾아보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꼼꼼히 살펴보며.
해발 1,400m에 있는 이곳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케이블카인데 장장 20여분을 넘게 타야 한다. 우연찮게 시청하게 된 '독박투어'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바나힐 가는 코스가 나왔는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코미디언 김준호가 두려움에 떨며, 케이블카를 타는 내내 바닥을 보고 가던 장면, 멀미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하는 여행 후기를 보았던지라 선뜻 칠순이 넘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 일정에 포함해야 하나 많이 고민했었다. 더군다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고산지대의 특성상 안개가 가득하게 되어 명소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날씨 요정이 함께 하지 않으면 비싸게 예약한 호텔비를 날릴 수도 있는 위험을 껴안아야 했으니,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고민하고 고민하다 호텔을 예약했다. 멀미약도 아이, 어른 것 종류별로 챙겼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목적지에 드디어 도착. 체크인을 마치고 케이블카를 탄다. 한국에서 가장 길다는 춘천 삼악산 케이블카를 탈 때도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타야 하는 바나힐 케이블카는 온몸에 전율을 전해주었다. 마치 놀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창밖 아래로 산과 울창한 나무들이 보인다. 조금 더 지나니 거대한 폭포가 보인다. 계속 위로 올라간다.
"와!!!"
저 아래에서 보이던 구름 속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들어왔다. 구름 속을 달리고 있는 케이블카는 마치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부모님의 입에서도 ‘와’하고 감탄의 외침이 연속으로 나온다. 우리는 지금 5,801m의 길이와 1,368m 높이를 상승하는 세계 최장 최고의 기네스 기록을 보유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있다.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의 어깨 뽕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역시 오길 잘했어!
드디어 바나힐 고지에 도착. 케이블카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오자,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프랑스풍의 아름다운 건물들과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그림과 같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동남아의 풍경에 익숙해 있던 우리는 눈이 한 번 더 동그래져서 바라본다. 여기는 유럽이다. 엄마를 살짝 흘겨보았더니,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이시다. 매년 여행을 다니는 엄마는 특히나 유럽을 좋아하신다. 그래서 베트남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약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예전에 하노이 호찌민을 다녀오시기도 하셔서, 베트남이 거기가 거기라고 생각하셨을 터이다. 그런데 여기는 베트남이지만 유럽이다. 엄마의 칠순 여행, 아직 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성공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벨보이를 따라 작은 골목으로 아담하지만 고풍스러운 한 건물에 들어선다. 수많은 엔틱한 건물들이 모두 호텔, 식당, 카페, 기념품 가게들이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엄마를 위해 프랑스 마을 전경이 보이는 방으로 배정해 달라고 사전 요청을 해놨기에, 우리의 숙소는 역에서 내려서 캐리어를 끌고 골목골목을 지나야 했다.
같이 요청한 엄마의 생일 케이크가 호텔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예쁘게 세팅이 되어있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 행복했다. 준비 과정은 상당히 번거로웠지만, 여행 내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니 출발 전의 고됨은 이미 잊었다. 결혼하고 내 가정 꾸리느라 부모님을 신경 쓸 수 없었는데, 이렇게라도 며칠 효도하는 것 같아 40대 중반의 딸은 울컥하고,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 범벅이 되어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짐을 놓고 거리로 나와 걸어본다. 고풍스러운 성당에 들어가 기도도 드린다. 아들은 기특하게 ‘행복한 추억 많이 만들게 해 주세요’ 하고 말한다. 거리의 아담하지만 역사가 깃든 우아한 상점, 레스토랑, 카페들. ‘걸어서 세계 속’으로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봤던 유럽 거리이다. 애주가이신 아빠를 위해 맥주 하우스에 들어가 생맥주도 마시고, 약간의 취기를 가지고 천천히 사원도 둘러보고,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서 사진도 찍고, 그리스 시대로 돌아간 듯한 조각상들이 늘비한 건축물들도 구경하고, 높은 전망대까지 올라가 본다. 바나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자 구름 사이로 비추는 빛줄기 사이로, 저 멀리 울창한 산들과 다낭시가 어우러진 신비로운 풍경에 숨이 멎는 것 같다. 뜨거운 여름이 한창인 베트남이었지만, 고산지대인 이곳은 내륙보다 6~7도가 낮은 25도로 날씨도 최적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손을 잡고 사랑하는 부모님의 등 뒤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내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풍경보다 감동적이었다. 지상에 천국이 있다면 과연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 기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아본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음악 소리가 나는 맥주광장으로 향했다. 아들은 흘러나오는 음악을 어른들은 시원한 맥주를 즐긴다. 필요한 순간마다 사진사와 짐꾼이 되어준 남편에게 감사하고, 즐거움을 열 배로 만들어준 아들에게 감사하고, 아프셨지만 건강을 되찾아 함께 여행길에 오르신 아빠, 그리고 올해 칠순을 맞이한 엄마, 그렇게 부모님과 남편, 아들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바나힐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마음속 깊이 담아둔다. 삼대의 천국 바나힐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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