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을 만들려면 먼저, 글을 써야 될 것 같아서.

by 수지김

뭐가 되든, 글을 쓰자.

허약한 상상에 머무르지 않게 글을 쓰자.

완벽하지 않은 글이라도 순간을 기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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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휘발성 분자들을 표현하고 담아내는 작업을 하다 보면 글을 쓰는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곧 사라져 버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순식간에 과거로 만들어버리는 '냄새'라는 감각을 어떤 형태로든 붙잡아야 하겠다는 마음에서 이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향을 만들어야 할 때 그 향의 구조나 서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조향사라는 직업을 갖기 이전, 오랫동안 디자인을 업으로 삼았다. 주로 책이나 화보 같은 출판물이나 굿즈에 들어갈 디자인을 했다. 어떤 디자이너든 각자의 작업 방식이 있겠지만 나는 주로 밑그림을 스케치하거나 레이아웃을 잡고 시작하는 편이었다. 밑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마감을 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애초에 시작할 때 충분히 예상하고 계획하고 착수하는 습관이 생겼달까. 마감이 임박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이 번잡한 작업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바로 켜지 않는 습관은 향을 만들기 위해 조향대에 바로 앉지 않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심지어 포뮬러를 적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향을 떠올리고 척척 조향대에서 향료를 쫙 꺼내다가 머릿속에 이미 그려진 향료 목록을 포뮬러에 쭉 적어가는 사람도 있겠지만(부럽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방식의 작업을 취하기 어렵다. 시도는 해 보았으나,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굉장히 먼 길을 돌아가게 되었다. 늘어놓은 단어들과 낙서들을 기움질해서 향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제야 포뮬러를 쓸만한 에너지가 생긴다.


이런 이유로, 아무튼. 뭐가 되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조향을 위한 밑작업이기도 하면서 완성된 향을 설명하는 재료들이 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