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ㅡ멜버른
스물여덟이 되던 해 겨울, 두 달간의 트레이닝 동안 손꼽아 기다린 첫 달 비행 스케줄이 나왔다.
첫 두 비행은 내가 이름 붙이자면 '깍두기 비행', 그러니까 정식 크루가 아니라 옆에서 현장 업무를 보고 배우는 비행이다. 보통 하나는 턴어라운드 하나는 레이오버를 받지만, 둘 다 턴어라운드일 수도 있고 둘 다 레이오버일 수 있다. 두 개 레이오버를 받는다면 ‘so lucky!’ 둘 다 턴이면 ‘poor you…’
나는 다행히도 무난하게 각각 하나씩 받았고, 이 두 비행 다음에 나오는 것이 공식적인 나의 첫 비행이 된다. 즉, 깍두기를 지나 정식으로 내가 지켜야 할 비행기 문이 정해지는 임무가 주어지는 셈이다(물론 문을 지키는 포지션 외에 타 포지션도 있으나, 주니어일 때는 대부분 문 door 에 배치된다.)
트레이닝 중 가장 설레는 주제는 어디로 첫 비행을 가게 될까, 이다.
몇 시간 레이오버(머무는 시간)를 어디에서 하게 될까, 사무장은 어떤 사람일까, 혹시 동기 누구와 같이 비행이 나오지는 않을까. 어떤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설레지만 아주, 걱정도 된다. 실수하면 어쩌지.
스케줄이 나오던 날, 두근대는 마음으로 클릭! 뭔가 길게 색칠된 일주일, 왜 이리 길어..?
싱가포르를 거쳐 호주 멜버른을 찍고 다시 싱가포르에 들렀다가 두바이로 돌아오는 ‘멀티 섹터’ 비행, 장장 6일간의 비행이 나왔다.
두바이에 정착하기 전, 2년 조금 넘게 싱가포르에서 지냈던 터라 첫 비행으로 싱가포르를 받은 것이 무척이나 안심되었다. 새로운 곳도 좋지만, 첫 임무로 오르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곳이 낯설지 않은 게 첫 비행의 부담을 덜어주는 기분이다.
엄마 것 빌려 입은 것 마냥 조금 큰 새 유니폼에 새 가방, 길이 안 든 새 구두를 신고 어색하게 출근을 했다. 브리핑 룸을 확인했는데 좀처럼 쉽게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미소를 다시금 장착해 슬며시 문을 열고
"싱가포르 가는 거 맞아? Is this room for going to Singapore?"
"아니 잘못 왔는데? Nope. A wrong room!"
"...?"
"싱가포르랑 호주 가는 거지요 To AZ as well! "
신입 크루들 놀리는 게 재미있는 연차 있는 사람들이다. 난 'No'한 마디에 눈을 끔뻑이며 놀랬기 때문에 그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줘 버렸다.
멀티 섹터인 만큼 크루들 간 트러블이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여러 번 강조했다. 총 네 번의 비행을 하게 될 터, 불편해지면 일주일 모두가 괴롭다. 크루들이 즐겁지 않으면 승객들도 알아챈다는, 나중에야 이런 말은 한 귀로 흘려듣는 식상한 브리핑용 대사 이건만 첫 비행 때는 가슴에 새길만큼 열심히 들었다.
일곱 시간 비행 동안 교과서처럼 서비스 매뉴얼을 따랐다. 밀 카트와 음료 카트로 정식 식사 서비스가 끝나면 일정 시간 간격마다 커다란 쟁반에 음료 서비스를 나간다. 경험이 좀 있는 크루들은 승객들이 많이 찾는 음료를 딱딱 맞춰 들고나가 깔끔하게 처리하고 들어오건만, 나는 물을 절반, 주스를 종류별로 절반, 탄산음료, 스낵까지 다 챙기고 있었다.
"토마토 주스 거의 안 마셔, 괜히 갖고 가지 마."
"개중에는 찾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래, 좋을 대로....(이 바보야)."
괜한 말이 아니었다. '토마토 주스를 이렇게들 안 좋아했던가' 생각하며 토마토 주스 세 잔을 남긴 채 갤리로 들어서는데, 길을 비켜준답시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크루를 피하면서 쟁반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다가 그만.
토마토 샤워를 하고 말았다.
세 잔 전부가 정수리부터 얼굴과 목을 타고 내려와 흰 유니폼 셔츠를 물들이고 붉은 새 신발을 적셨다. 점도가 높은 탓에 나는 눈도 떠지지 않고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슬로 모션처럼 갤리에 있던 대여섯 명 크루가 휴지를 들고 나에게 다가오는 장면이 기억날 뿐이다.
기온과 습도가 말도 못 하게 높은 싱가포르에 착륙할 때, 발갛게 물든 내 셔츠를 가리기 위해 긴 팔 재킷을 입었다. 사무장은 통일성을 위해 열일곱 명 크루가 전부 재킷을 입도록 지시했다. 버스로 이동하는데 송골송골 땀이 맺힌 동료를 보니 미안하다.
"블러디 메리(토마토 주스에 보드카를 섞는 칵테일) 한 잔 사줄까?"
" ...?"
"토마토 주스를 그렇게 좋아한다며, 그걸로 샤워했다던데 크흡"
"아하하... 기내에서만으로 충분해요"
호텔 로비 바에서 일명 '랜딩 비어', 한 잔 기울이고 계셨던 기장과 부기장, 사무장이 나를 보고 또 농을 한 것이다.
첫 비행 신고식이 이 정도면 추억할 만하다고 위로했다. 새 셔츠에 묻은 토마토 주스 자국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