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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큐마 Apr 10. 2022

우리 엄마는 토끼인데, 저는 호랑이입니다만...

직장생활과 백호

옛날 옛적에 호랑이 한 마리가 살았어요. 그 호랑이는 토끼들의 품에 안겨서 컸어요. 토끼는 할머니였고, 할아버지는 호랑이였어요. 토끼와 호랑이 사이에서 난 자식은 대부분 토끼였지만, 가끔씩 호랑이가 나오곤 했어요. 호랑이들의 특징은 용감하다는 것이었어요. 토끼들이 집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호랑이들은 밖에 나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다른 동물들을 잡고 풀을 뜯어와 토끼들을 먹였답니다. 호랑이는 주로 남자였고, 토끼는 주로 여자들이었어요.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태어났어요. 여자애였어요. 호랑이들은 어린 여자 호랑이를 백호라고 이름 짓고 온 맘을 다해 예뻐했어요. 호랑이들은 별 걱정이 없었지만, 토끼들은 백호를 보며 늘 걱정이 앞섰어요.


"여자가 호랑이면 힘들 텐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호랑이들은 필연적으로 싸우며 살 팔자이기 때문이에요. 토끼들은 백호에게 제일 먼저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는 법을 가르쳤어요. 여자여서 발톱을 숨기는 법을 가르치지는 것은 아니었어요. 호랑이들이 제일 많이 하는 실수가 토끼들에게도 발톱을 휘두르는 것이었거든요. "집 안에서 자신의 강함을 표현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단다. 강한 힘이 있더라도 그걸 잘 써야 해." 토끼들은 백호에게 가르쳤어요. 그렇게 백호는 해맑은 고양이처럼 자랐어요. 누군가 먼저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굳이 발톱을 세우지 않았어요. 토끼들이랑 토끼풀을 먹고 토끼들에게 배를 보이며 애교를 부렸어요.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솜털 같은 냥냥 펀치를 날렸어요. 토끼처럼 뛰는 법을 배우고,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했어요.


그러나 청소년기가 되고 성인이 되자 백호는 점점 호랑이 티가 나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숨겨도, 토끼처럼 뛰어보려고 해도 이제는 땅이 쿵쿵 울렸어요. 백호는 점점 토끼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답답함을 느꼈어요.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 산, 저 산을 넘으면서 뛰어다녔어요. 달리다 보면 이 바위 저 바위에 긁혀 자연스럽게 백호의 발톱은 점점 날카로워졌어요. 그때부터 백호는 앞발을 드러내고 가끔씩 울부짖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토끼들은 백호의 말이 타인을 해칠 수 있음을 알려주었어요. 발톱을 적재적소에 고급스럽게 드러내야 한다고 했어요. 백호는 늘 자신이 토끼인가 호랑이인가 고민했어요. 그러나 이내 둘 다 임을 인정하고 행복한 호랑이이자 토끼로 살았어요.


그런데 백호가 회사에 가고 나서는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우리는 네가 호랑이라고 생각해서 뽑았어." 백호가 토끼처럼 뛰려고 할 때면 선배들은 발톱을 세우고 사냥감을 멋지게 사냥하는 법을 알려줬어요. "자, 따라 해 봐. 저기 가서 이렇게 잡으면 되고, 여기는 저렇게 잡으면 돼." 백호는 처음에는 조금 버벅거렸지만, 이내 멋지게 따라 할 수 있었어요. 거의 고양이처럼 살던 백호는 다시 발톱을 세우고 다녔어요. 백호는 뿌듯했어요. 토끼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호랑이처럼 살 수도 있구나 깨달았어요.


그러나 한 편으로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웠어요. 백호의 발톱에는 다른 짐승들의 피가 늘 묻어있었어요. 평소에도 누군가에게 배를 보이며 애교를 부릴 수가 없었어요. 대신 백호는 늘 다른 짐승들을 경고의 눈빛으로 노려보아야 했어요. 조금이라도 토끼처럼 굴려고 하면 선배들이 한숨을 쉬었어요. "너 호랑이래매! 토끼처럼 왜 그래? 우리에게 토끼는 필요 없어! 토끼는 널렸어!" 결국 백호는 선배 호랑이 뒤를 따라다니는 어엿한 호랑이가 되었어요. 자신에게서 토끼 향이 난다고 하는 사람들을 할퀴고 다녔어요.


가끔씩 백호는 그냥 발톱을 숨기고 사는 과거가 그리워요. 고양이 같은 백호, 토끼를 사랑하고, 토끼와 함께 자란 백호. 그 자체로도 충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나는 토끼가 되고 싶은데, 호랑이가 되어야 한다고 해요. 토끼처럼 뛰고 토끼처럼 토끼풀을 먹고 토끼처럼 유순하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백호는 운명인 것처럼 이 산 저 산을 헤집고 다니고, 작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뽐내며 일하겠죠.




내 발톱이 녹화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너무 토끼 같을 가봐 이 일을 하면 안 되겠다고 고민한 순간들을 기억한다. 나는 내가 정치인들에게 못 다가갈 줄 알았다. 그들에게 쫄고 그들에게 질문을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또 닥치면 다 하더라. 차분하게, 발톱을 세우고,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더라. 물론 보완해야 할 점은 있겠지만, 그냥 나는 원래 호랑이긴 하는구나를 느꼈다. 근데 이런 내가 어색하고, 자랑스럽지 않았다. 나는 토끼처럼 사는 게 좋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복슬복슬한 손과 복슬복슬하고 작고 귀여운 토끼가 좋다. 그런데 나는 어째 토끼랑 같이 자라기만 한 호랑이 같다. 내 손을 보면 귀여운 토끼풀의 향기가 나는 토끼의 손이 아니라, 약간의 피 냄새가 나는, 발톱이 달린 호랑이 손 같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는 자신이 오리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래서 신난다. 근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 사주는 불로 가득 차 있고, 심지어 성격은 호랑이인데, 왜인지 나는 그게 싫다. 나에게 재료와 힘이 있는데, 왜 나는 이 일이 재미가 없고 싫을까? 나는 이 발톱으로 누군가를 해치는 게 너무나도 싫다. 이런 평화주의적인 호랑이를 위한 나라는 없는 걸까. INFP 호랑이의 슬픔이다.


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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