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습에서 받는 수치심은 시대적 부산물일까?
그녀는 시를 통해 상처받은 기단을 위로하고
시를 통해 인습에서 받은 수치를 극복하고
삶에서의 불운을 시의 행운으로 바꾼 시인?
한 사람의 삶을 나의 시선으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쉴러처럼 가늠할 수도 없을
고통을 느꼈을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한 것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알아서다.
오늘은 그녀의 시 한 편을 골라서 읽는다.
화해
큰 별이 내 무릎에 떨어졌다
우리는 밤을 새우기 원한다
하프 줄을 걸 홈이 있는 언어로
기도하기 위하여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세상은 신으로 충만하다
우리의 마음은 어린아이,
달콤한 쉼을 얻기를
우리 입술에 키스를,
어째서 주저하오?
당신 마음을 내 마음에 잇대지 마오
내 얼굴은 항상 당신 피에 붉게 물든다오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우리 서로 안고 있으면 죽지 않으리
큰 별이 내 무릎에 떨어졌다
- 엘저 라스커 쉴러
Else Lasker-Schüler (1869 – 1945)
삶의 첫 단추인 태생부터
그녀는 굴곡진 여정을 걷게 될 것을 알리듯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유태인이었다.
25세에 첫 번째 결혼은 베를린의 의사 요나탄 라스커와 했다.
본인이 사랑하거나 원해서 했던 결혼이 아니라
1903년에 이혼했다.
7개월 뒤 게오르그 레빈과 재혼했으나,
1910년에 별거하기 시작해 2년 뒤 또 한 번의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1899년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고
1902년에야 첫 시집 <스틱스 Styx>를 냈지만,
그녀는 10대와 20대에
이미 표현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1932년에 당시 독일의 가장 중요한 문학상이었던
크라이스트상을 수상했다.
1927년, 28세의 아들이 결핵으로 죽은 뒤
깊이 상심한 데다 나치 정권을 피하고자
취리히를 거쳐 1934년 예루살렘에 정착했으며,
1945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시집
<블루 피아노 Mein blaues Klavier >(1943)를 출간했다.
라스커 쉴러는 당대 최고의 연극배우
사라 베른하르트나 작가 조르주 상드처럼 남장을 하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이혼 후 아들을 데리고,
초기 표현주의의 온상이었던 베를린에서
오디세우스적인 보헤미안의 생활을 했다.
물질적으로는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언제나 활력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릴케와 동시대인이었으며,
당시에는 그보다 더 큰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평론가들은 그녀를 <독일의 사포>라고 칭했다.
그녀의 시에 나타나는 관능은 종교적 체험과도 같다.
라스커 쉴러는 시가 사람들로 하여금
인습적인 수치심을 극복하고
상실된 감성적 삶의 가능성을 찾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고향에서 쫓겨나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빈곤 속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그녀는 사람을 구원하는 사랑의 힘을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