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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고래 Mar 09. 2021

남편 빼고 다 바꿨다

낭랑한 그 목소리 쿠쿠

 

 2007년 잠실 L백화점. 친정 엄마 뒤를 따라 쫄래쫄래 가는 나는 마냥 즐거웠다. 모아 놓은 돈도 없고, 당시 학생이던 남자를 만나 사랑해서 결혼하겠다는 만 스물여섯 철없는 딸의 미소는 천진하다 못해 난만하고 산만했다. 백화점 혼수 매장의 물건들을 고르며 흥정까지 시도하는 엄마 앞에 그저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헤헤거렸다. 지금은 너무도 꼴 보기 싫은, 깨지지 않는 도자기 그릇들을 고를 때도 말이다. 내가 그때 정신만 차렸더라면, 조금만 센스를 장착했더라면 그 그릇을 고르지 않는 것인데 후회를 가끔 한다. 언젠가 코렐도 레트로로 대접받는 날이 오겠지. 그렇게 코렐 접시를 고른 엄마는 다른 가전제품과 가구들을 고르면서도 칼은 사지 않았다. 칼만큼은 사돈 쪽에서 사줘야 한다며 엄마가 그 어떤 떠도는 미신들을 내게 주입시켰다. 결국 칼 빼고 모든 살림살이를 장만한 지 14년이 지났다. 대부분은 사라졌다. 팔거나, 버리거나, 바뀌거나. 해외로 이사를 가고, 여기저기 이동이 잦았던 탓이다. 그럼에도 남편만큼 유일하게 내 옆에 꼭 붙어 있던 녀석이 있다. 전기밥솥이다.    


 나는 한국인 하면, 김치보다도 밥이 먼저 떠오른다. 밥이 주는 어감이 좋다. 따뜻하고, 촉촉하고, 배부르고, 긴장이 풀린다. 밥은 만든다고 하지 않고 짓는다고 한다. ‘짓다’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에 짓는다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한자  (지을 작)에서 나온 말로 추측이 된다. 집을 짓듯이, 정성스레 밥을 짓는 것은 분명한 수고와 애씀이 들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주부의 수고를 덜어준 대표적인 전자제품이 이 전기밥솥이다. 빠른 시간 내에 찰진 밥을 만들어내는 압력밥솥도 많이 쓰지만, 자주 들여다볼 필요가 없고 따뜻한 보온 기능이 탑재된 전기밥솥을 더 많이 사용한다. 외국인들도 한국에 오면 제일 먼저 사는 제품이 아마 이 ‘전기밥솥’ 일 것이다.


 내솥과 패킹만 몇 번 갈아주면 10년 이상은 쓴다. 하지만 그 10년을 20년처럼 살았던 탓일까. 과도한 노동과 수고에 전기밥솥은 생을 다하고야 말았다. 이상하게 슬펐다. 텔레비전을 바꾸거나 정수기를 바꿀 때와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먹먹한 마음은 잠시. 금사빠 나는 당장 새로운 밥솥을 검색했다. 사실 그동안 밥이 잘 되지 않아 불편했던 차. IH고기압 기능이 있는 블랙 컬러의 밥솥을 골랐다.


“안녕하세요. ㅋㅜㅋㅜ입니다.”

목소리는 변함 없는 듯. by 이주부

아, 카랑카랑한 목소리. 신세계였다. 이제 오분도미에서 올 현미로 갈아탄 우리 집에서는 압력밥솥만큼 찰진 현미밥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그녀에게 오글오글 편지를 쓰고야 말았다.



13년 만에 만난 새 짝꿍에게.


나는 늙었는데, 너의 목소리는

더 맑고 활기차 졌다.


내솥과 패킹을 여러 번 바꾸었지만,

스팀이 슬슬 새던.

포슬한 밥을 만들어내지 못한 옛 짝꿍은

아마 월E처럼 고철들 사이를 돌아다니겠지.

쌍둥이 넷을 키워낸 옛 벗의 수고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한국 사람은 밥심이라고,

오로지 밥만 해대는 이 기계에

주부는 왜 이토록 설레는지.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가도록

매일 취사병 근무를 할 새 짝꿍.


어쩌면 하루에 두 번 일할지도 몰라.

밥을 많이 하기 좋아하는 주인 때문에

너의 보온기능은 매뉴얼 12시간을 넘겨

40시간을 훌쩍 넘길지도 모르고.


중학생이 된 아들들이 수시로 너를

열어 밥을 비벼 먹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잘 부탁할게.

우리 오래가자.


잘 왔어!



ㅋㅜㅋㅜ 홍보 글이 아니다. 세탁기 다음 소중한 주부의 밥솥에 감동한 나머지 쓴 글이다. 밥솥 옆 에어프라이어, 믹서기들이 서로 옥시글옥시글 어우러져 부엌을 채우니 참 재밌다. 그들의 소리와 스팀 덕에 따뜻하고 촉촉하고 배부르다. 이제 뭘 바꾸나. sns에서 내 글을 엿보던 남편의 미세한 떨림은 기분 탓이겠지.




수고로움 레시피

대충 막 하지만 이상하게 맛있는 이주부 밥상

(※참고: 기본 베이스 양념이 다 맛있어서 그런지 그럭저럭 맛이 납니다. 집된장과 국간장은 한살림 선생님들 따라가서 일손 거둔 거밖에 없지만 직접 만든 것들이라 훌륭합니다. 대부분 유기농 재료로 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빠의 건강 때문에 현미밥이 대부분입니다. 정확한 계량은 하지 않는 편이어서 맛이 뒤죽박죽입니다. 빠른 시간에 후다닥 차리는 게 특징입니다. 따라 하지 마세요. ><)

<어떤 저녁상(1)>

1. 죽염, 후추, 오일로 버무린 닭고기에 튀김가루 묻혀 오븐에 25분 정도 굽기.

2. 경기도 친환경급식센터에서 구입한 냉동감자 같이 굽기

3. 족발은 내가 먹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구매

4. 샐러드와 어묵무국.


<어떤 저녁상(2)>

1. 과일과 야채 치즈를 듬뿍 올리고 발사믹식초 뿌리기

2. 닭은 한번 데친 후 양념과 감자를 넣어 푹 끓이면 편하다.

3. 양념은 사과농축액이나 사과를 갈아서 한국의 기본 재료와 함께 만든다. (간장, 고춧가루, 다진마늘, 생강 조금, 조청)

4. 살얼음 동동 동치미는 시모님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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